따지고 보면 클래식 음악계만큼 남성 중심적인 분야도 없다. 정치권은 물론 재계에서도 ‘여풍(女風)’이 분 지 오래지만, 클래식 음악계는 아직도 20세기다. 이렇다 할 여성 지휘자도, 작곡가도 없다. 세계적인 오케스트라는 하나같이 ‘남자 지휘자’가 ‘남자 악장’과 손발을 맞춰 ‘남자 위주의 단원’들을 이끄는 구조다.
100년 넘게 이어져온 이런 남성 중심의 오케스트라 시스템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세계 최고 오케스트라로 꼽히는 베를린 필하모닉은 사상 처음 여성 악장을 임명했고, 미국의 명문 관현악단인 뉴욕 필하모닉은 180년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 단원 수가 남성보다 많게 재편했다. 전문가들은 “사회 전반을 휩쓴 남녀평등, 여권 신장 등의 이슈가 이제야 클래식 음악계에 닿은 것”이라며 “세계적인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여성 상임 지휘자가 나올 날도 머지않았다”는 전망을 내놨다.
사레이카가 베를린 필의 ‘1호 여성 악장’ 타이틀을 갖게 된 건 그만한 경력을 갖췄기 때문이다. 그는 파리국립고등음악원을 거쳐 퀸 엘리자베스 음악 채플에서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오귀스탱 뒤메이를 사사했다. 2012년부터 2021년까지 유명 실내악단 아르테미스 콰르텟의 연주자로 활약하며 뛰어난 연주력과 리더십, 앙상블 역량을 인정받았다. 지난해부터 베를린 필에서 연주해온 그는 올해 ‘제1바이올린 콘서트마스터 오디션’에서 우승했다.
베를린 필의 라이벌인 빈 필하모닉은 한 발 빨랐다. 2011년 불가리아 출신 바이올리니스트 알베나 다나일로바를 사상 첫 여성 악장으로 뽑았다. 독일 명문 오케스트라 베를린 슈타츠카펠레는 2017년 최초의 동양인·여성 악장으로 한국인 바이올리니스트 이지윤을 임명했다.
그동안 전통 있는 오케스트라들은 여성을 꺼렸다. 출산과 육아로 인해 최상의 연주 실력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그래서 빈 필은 1996년까지는 여성에게 입단 오디션을 허용하지 않았다. 베를린 필은 1982년에야 여성 단원을 뽑았다. 이랬던 전통의 오케스트라들이 사회 변화에 맞춰 변신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선 오래전부터 양적인 측면에서 여성 단원이 남성을 압도했다. 국내 양대 오케스트라인 서울시향(남 31명·여 59명)과 KBS교향악단(남 28명·여 60명) 모두 여성 단원이 남성보다 두 배 많다. 음악을 전공하는 여성이 남성보다 훨씬 많다 보니 자연스럽게 여초 현상이 생겼다. 하지만 질적인 측면에선 여전히 남성 위주다. 여성이 음악감독(상임지휘자)을 맡은 오케스트라는 많지 않다. 성시연(47·경기 필하모닉), 여자경(53·강남 심포니) 정도다. 해외에서도 조앤 팔레타(69·버지니아 심포니, 버펄로 필하모닉), 마린 올솝(67·볼티모어, 상파울루 심포니), 미르가 그라지니테 틸라(37·영국 버밍엄시 심포니) 등 손에 꼽힐 정도다.
클래식 음악계 관계자는 “보수적인 클래식 음악계도 여풍이란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을 것”이라며 “시간이 걸리겠지만 해외는 물론 국내에서도 주요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여성 지휘자가 나올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김수현 기자 ksoohyu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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