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숭인동에서 빈티지 매장을 운영하는 박모씨(32)는 20일 동묘공원을 찾아 쌓여있는 헌 옷 더미를 뒤지다 발걸음을 돌렸다. 희소성이 있거나 깔끔한 ‘A급’ 매물이 자취를 감췄기 때문이다. 그는 “요즘은 헌 옷 공장에서 물건을 떼어 올 때도 30~40% 정도 웃돈을 얹어줘야 겨우 한두 벌 건진다”고 했다.
과거엔 동묘시장이 있는 숭인동, 동대문 상권 등이 핵심이었다면 요즘은 공인된 ‘핫플’ 성수동이 새 중심지로 뜨는 분위기다. 이곳에선 유명 디자이너들의 옛 작품을 구할 수 있는 빈티지 편집숍이 SNS를 통해 입소문을 타고 있다.
성수동 빈티지 매장을 애용하는 정윤재 씨(30)는 “일본 뮤지션이자 디자이너인 후지와라 히로시의 옷을 좋아하는데, 한국에서 구하기 어렵고 팔지도 않는다”며 “성수동에 예전 매물이 올라왔다는 인스타그램 게시글을 보고 빈티지숍을 찾기도 했다”고 말했다.
빈티지 상권이 확산하는 것은 너도나도 교복처럼 입는 이른바 ‘클론(복제)패션’에 질린 젊은 층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성수동에 있는 빈티지 리폼 매장 이스트오캄의 손현덕 사장은 “우리 제품은 ‘원&온리’ 원칙으로 소량 생산한 후 다시 내놓지 않는다”며 “세월이 지나며 가치가 오르는 희귀 제품을 찾는 수요가 많다”고 했다.
이런 흐름이 나타난 건 크게 세 가지 이유 때문이다. 글로벌 물류난 여파로 해외에서 들어오는 희귀 의류가 크게 줄었다.
엔데믹(감염병의 풍토병화)이 가시화한 지난해부터 그나마 사정이 나아졌지만, 불경기를 견디다 못해 주요 의류 무역업체들이 파산한 게 여파를 미치고 있다. 국세청에 따르면 중고 의류·물품 수입액은 2019년 3540만달러에서 지난해 2668만달러로 24.6% 줄었다.
한정된 내수시장을 놓고 업자들끼리 벌이는 매물 확보 전쟁도 치열하다. 경기 안산시 집하장 ‘헌옷알뜨리’의 변서현 사장은 “30t 규모 옷 무더기에서 각자 좋아 보이는 물건을 골라 가져가는데, 전쟁터가 따로 없다”고 말했다.
당근마켓 등을 통한 개인 중고 직거래가 늘어 헌 옷 배출 자체가 줄었다는 분석도 있다. 성수동 빈티지 매장 ‘wwtw’의 윤영도 사장은 “흔한 구제 의류 도소매업은 이제 개인 간 직거래에 비해 경쟁력이 없다”며 “빈티지업계도 일반 소비자가 구하기 어려운 하이엔드 명품 위주로 재편 중”이라고 설명했다.
헌 옷 확보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업계에서 능력 있는 도매 거래처는 ‘1급 기밀’이 됐다. 동묘의 한 빈티지 매장 사장은 “강남의 부촌 아파트 단지에서는 가끔 버버리 등 명품 의류가 태그도 안 뗀 채 버려지기도 한다”며 “그런 물건은 아는 사람들끼리만 정보를 주고받아 매수 경쟁이 치열하다”고 설명했다.
안시욱/조봉민 기자 siook95@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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