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은 자연이 그리는 추상화다. 날씨와 시간에 따라 변하는 하늘의 색, 흘러가는 구름이 만들어내는 다채로운 모양은 바라보는 이들에게 편안함과 행복감을 안겨준다. 그중에서도 최고 걸작은 해가 뜨고 질 때 나온다. 붉은 기운이 더해지면 하늘은 아름다움 위에 신비로움이란 옷을 한 꺼풀 더 꺼내 입는다.
정주영 작가(54·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장)는 그래서 하늘의 모습을 표현한 자기 작품을 ‘추상화면서도 구상화’라고 설명한다.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 ‘그림의 기후’에는 정 작가가 하늘과 산을 모티브로 그린 작품 60여 점이 걸려 있다.
이번 전시 전까지만 해도 정 작가의 별명은 ‘산의 작가’였다. 북한산부터 알프스산맥까지 지난 20년간 산만 그렸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은 서울시립미술관과 아트선재센터 등 유명 미술관의 ‘러브콜’을 받을 정도로 인기였다. 그렇게 산만 바라보고 살던 어느 날, 그의 눈에 산 뒤에 펼쳐진 하늘이 들어왔다.
“산에 있는 봉우리나 바위에는 사람의 몸이나 특정 사물에서 이름을 딴 것이 많습니다. ‘할미바위’나 ‘칼바위’처럼요. 그만큼 산은 모양이 명확한 존재입니다. 하늘은 달라요. 정해진 모양도 없고 색도 모호합니다. 항상 같은 모습으로 해가 뜨고 지는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매일매일 다릅니다. 갑자기 ‘하늘이 이토록 아름다운 건 매 순간 얼굴이 바뀌기 때문이 아닐까. 이걸 화폭에 담아보면 어떨까’란 생각이 들더군요.”
하지만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을 움직이지 않는 그림으로 표현하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휴대폰으로 하늘 사진을 멋지게 찍어도 웬만해선 다시 들여다보지 않는 것과 같은 이유다.
정 작가는 하늘의 오묘한 색을 그림에 담기 위해 얇은 붓으로 반복해서 색을 칠하는 기법을 택했다. 가느다란 붓에 물감을 묻힌 뒤 반복해 휘둘러 여러 색을 혼합한 것. 그 덕분에 그의 작품은 점묘법과 같은 효과를 낸다. 다양한 색의 필획들은 보는 사람의 눈에서 섞여 오묘한 색조로 변한다.
일몰을 표현한 대형 작품 ‘M21’이 단적인 예다. 멀리서 보면 그저 무지개빛 그라데이션에 불과하다. 하지만 가까이서 보면 작은 붓으로 그은 여러 색의 선들이 눈에 들어온다. 정 작가는 “작품과 관객의 거리에 따라 색과 느낌이 바뀐다”며 “교향악에서 여러 악기와 화성이 쌓여 장엄한 음악을 만드는 데서 착안한 기법”이라고 설명했다.
기법만큼이나 전시장에 나온 캔버스들의 모양도 독특하다. 흔한 사각형 캔버스 외에 작고 둥근 캔버스를 여러 개 붙여놓은 작품도 있고, 타원형의 캔버스도 걸려 있다. ‘하늘에는 정해진 모양이 없다’는 뜻을 담았다는 설명이다. 대형 작품을 중심으로 전시장을 꾸미는 여느 전시회와 달리 소품을 대형 작품과 같은 비중으로 ‘대우’한 것도 특이하다. 정 작가는 “같은 주제를 작은 면적에 표현하려면 더 오래 고민해야 한다”며 “그래서 큰 작품보다 작은 작품이 더 그리기 어렵다”고 말했다.
다른 전시보다 평균 관람시간이 긴 편이다. 작품이 전부 추상화여서 구석구석 뜯어봐야 할 세부 묘사가 없는 걸 감안하면 이례적이다. 갤러리현대 관계자는 “저녁노을을 바라보는 것처럼, 오랫동안 멍하니 작품을 보게 된다는 관객이 많다”고 말했다. 전시는 3월 26일까지.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