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대 반도체 디자인하우스인 에이디테크놀로지의 박준규 대표는 한국에서 팹리스(반도체 설계전문)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생태계를 가장 잘 이해하는 전문가로 손꼽힌다. 박 대표는 21일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디자인하우스가 얼마나 잘 받쳐주느냐에 따라 파운드리 수율이 결정된다"며 "칩 사이즈가 커지고 공정이 복잡해지면서 디자인하우스 역할이 단순 지원을 넘어 설계까지 맡는 수준에 이르렀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박 대표와의 일문일답.
반도체 디자인하우스가 무엇인지 설명해달라
디자인하우스는 팹리스가 만든 설계도를 바탕으로 반도체를 제작하는 파운드리 공정에 맞춰 각종 기술을 지원하는 기업을 뜻한다. 예컨대 의상 디자이너(팹리스)가 드로잉(설계도)을 마치면 디자인하우스가 옷을 생산하기 위한 옷감 구입 및 마감을 최적화하고 재봉소(파운드리)는 이에 맞춰 옷을 만든다고 보면 된다. 최근 다양한 형태의 드로잉(시스템반도체)이 쏟아지는 추세여서 대형 재봉소(TSMC, 삼성전자)일수록 처리할 일감이 많아 작업이 세분화돼 디자인하우스 역할이 커졌다. 통상 5나노미터(㎚·1㎚=10억분의 1m) 수준의 반도체를 개발하려면 프로젝트당 100여명의 숙련 설계 엔지니어가 필요하지만 국내 인력은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다.
에이디테크놀로지에 어떻게 합류하게 됐는가
1992년 삼성전자 시스템LSI사업부에 입사해 반도체 전문성을 쌓았다. 2005년부터 10여년간 에이디테크놀로지 영업 총괄을 맡고 있고 2020년에 총괄 부사장을 역임하며 삼성전자의 디자인솔루션파트너인 'DSP(Design Solution Partner)' 합류를 추진했다. 회사가 2020년 TSMC 디자인하우스파트너인 'VCA(Value Chain Aggregator)' 지위를 내려놓고 DSP 생태계에 진입하기까지 대부분의 과정을 진두지휘했다. DSP 합류 후에도 창업주인 김준석 대표와 각자 대표 체제로 회사를 운영하면서 국내 디자인하우스 저변 확대에 힘쓰고 있다.
삼성 DSP 합류 전 TSMC VCA 생태계에 몸담고 있었다
많은 분들이 "왜 굳이 TSMC를 벗어나 삼성 파운드리로 왔느냐"고 묻는다. 우리는 2005년부터 2019년까지 TSMC와 일했다. 과거 TSMC가 삼성과 LG쪽 설계 고객을 공략하기 위해 한국에 디자인하우스를 찾고 있던 중 우리가 지원했고 여러 과정을 거쳐 TSMC 생태계에 진입했다. TSMC같은 경우 협력사의 단계가 있다. 처음에는 엔지니어링 서비스만 하는 DCA(Design Center Alliance) 생태계가 있다. 이후 안정화가 되고 규모가 커지면 VCA 단계로 넘어간다. 우리같은 경우 3년 만에 VCA가 됐다. 상당히 빨리 업그레이드된 케이스다.
삼성 DSP로 넘어오겠다고 결심한 계기는 무엇인가
TSMC는 파운드리 비즈니스를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런만큼 보안이 생명이다보니 영업 정책상 우리가 계속 성장하기에는 보이지 않는 제약이 많다고 판단했다. 때마침 삼성전자가 파운드리를 본격적으로 강화하기 시작했다. 삼성전자는 TSMC보다 늦게 파운드리에 뛰어들었기 때문에 우리가 경험한 비즈니스가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TSMC의 칩 디자인 과정은 삼성 파운드리와 같은 듯 다른 부분이 존재한다. 이를 이해하고 효율화를 끌어올리기 위해 2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다.
삼성 파운드리가 TSMC를 따라잡을 수 있을까
TSMC와 삼성 파운드리의 점유율 격차가 두 배 정도 나지만 디자인하우스 시각에서 봤을 때 점유율은 중요하지 않다. TSMC는 3나노까지 기존 핀펫(FinFET)을 적용하지만 삼성은 차세대 공정인 게이트올어라운드(GAA·Gate-All-Around)를 먼저 적용했다. 이게 자리 잡으면 점유율은 금방 좁혀지거나 심지어 역전도 가능하다. 글로벌 팹리스들은 굉장히 냉혹하기 때문에 삼성 GAA가 기술적으로 우위에 있다고 판단하면 분위기는 금방 달라질 가능성이 높다. 엔비디아 같은 팹리스가 다음 물량을 어디에 맡기느냐에 따라 파운드리 파워 게임도 다른 양상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대만의 디자인하우스 역량은 한국과 비교 불가일 정도인가
TSMC와 일할 때 GUC, 알칩 같은 대만 디자인하우스와 경쟁했다. 당시 대만과 한국 업체의 경쟁력 자체에는 큰 차이가 없다고 느꼈다. 대만도 5나노 이하의 최첨단 물량은 몇몇 소수 업체들만 할 뿐이다. 다만 생태계 차이는 크다. 파운드리 인프라, 반도체 설계자산(IP), 특화 소프트웨어, 디자인하우스를 대하는 정부와 업계 인식 등이 그렇다. 미세 공정이 본격화하고 워낙 다양한 반도체가 만들어지면서 디자인하우스가 준비해야 할 기술적인 부분이 굉장히 많아졌는데 대만은 자체 생태계 내에서 모두 소화가 가능하지만 한국은 그렇지 않다.
최근 국내 여러 대학 반도체학과에서 등록 포기 사태가 발생했다. 대책이 있을까?
한국은 선진국이다. 인력들이 가진 기대치가 높아졌고 거기서 오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한가지 아쉬운 건 한국에 스타 반도체 엔지니어가 없다는 점이다. 젠슨 황 엔비디어 최고경영자(CEO)나 리사 수 AMD CEO 처럼 비전과 영감을 줄 수 있는 '반도체 스타'가 나와야 한다. 국가와 기업이 연구개발(R&D)을 강화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산업이 얼마나 중요하고 가치가 있는지 알리는 홍보도 병행돼야 한다. 다행히 과거에는 파운드리와 디자인하우스 업계가 전혀 관심을 받지 못했지만 최근에는 분위기가 달라졌다. 높은 관심이 큰 힘이 되고 실제 경쟁력으로 이어지고 있다. 정부의 꾸준한 관심이 필요하다.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하다.
자율주행차, 챗GPT로 인해 차량용 반도체, AI 및 고성능 컴퓨팅(HPC) 수요가 늘고 있지만 각각 요구하는 퍼포먼스가 다르다. 우리는 영국 반도체 설계회사 ARM의 디자인파트너사다. ARM의 우수 IP를 기반으로 오토모티브, HPC, 엣지AI 플랫폼을 개발해서 고객들 제품 개발에 활용하고 있다. 이미 성과도 나고 있다. 지난해 10월 독일 AI 반도체 전문기업 '비디안티스'와 자율주행 시스템온칩(SoC) 개발 계약을 맺었고 추가적으로 유럽 및 미국 쪽 고객사 확보를 목전에 뒀다. 글로벌 고객사들의 까다로운 요구에 대응하기 위해 대규모 인력 채용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현재 TSMC랑 할 때보다 일이 훨씬 많아졌다. 2~3년 후부터 본격적인 도약을 시작해 2030년 연매출 1조원 시대를 열겠다.
수원=강경주 기자 qurasoh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