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남원 선원사의 주지 운문스님은 지난해 11월 명부전에서 기도하던 중 뜻밖의 그림을 하나 발견했다. 불단에 봉안된 '지장시왕도' 속에 태극기가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지장시왕도는 성불(부처가 되는 것)마저 포기하고 육도(지옥·아귀·축생·수라·하늘·인간세상 등 여섯 가지 세상)의 중생을 구원한다는 '지장보살'과 그를 보필하는 '도명존자', 지옥의 일을 관장하는 10명의 왕 '시왕' 등을 그린 그림이다.
태극기가 그려진 부분은 시왕 중에서도 변성대왕으로 추정되는 인물의 관(冠)이다. 어른 손바닥 만한 크기(가로x세로, 8.5X3cm)로 그려져 있다. 태극의 지름은 2.2cm다. 태극의 양은 홍색, 음은 뇌녹색으로 채색됐다. 양 태극을 백색이 둘러싸고, 위쪽에 건괘와 리괘, 아래쪽에 곤괘와 감괘를 배치했다.
김창균 대한불교조계종 성보존위원회 성보위원(전 동국대 불교미술전공 교수) 등이 기록을 조사한 결과, 이 그림은 일제강점기인 1917년에 그려졌다.
김 위원은 "일제강점기라는 시기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민족의 염원인 독립의지를 나타내기라도 하듯 태극기를 불화에 그려넣었다"며 "당시 시대상을 투영하고 있는 근대문화유산"이라고 했다.
태극기를 오래 연구한 송명호 전 문화재청 근대문화재분과 전문위원은 "불화를 통틀어서 태극기 그림이 발견된 것은 최초"라고 주장했다.
당시 불화 '증명(證明)' 소임을 맡은 진응 스님(1873~1941)이 독립운동가였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증명은 불화가 완성된 후 최종적으로 감수하는 것을 뜻한다. 진응스님은 만해 한용운 등과 함께 일제의 한국 불교 장악에 맞선 인물이다. 화엄사 주지 등을 지냈다.
김 위원은 조사 보고서에 "범어사에 머물던 한용운 스님이 1912년 화엄사에 주석하시던 진응 스님에게 '포교차 만주에 갔다가 강도를 만나 죽을 뻔했고, 오랫동안 소식이 끊겨 아쉽고 그립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며 "독립에 대한 열망도 서로 같았으리라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고 했다.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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