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요인 등을 들며 “에너지가격 정상화가 불가피하다”고 했던 정부 분위기가 달라졌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주 소집한 비상경제민생회의에서 도로·철도 등 주요 공공요금의 상반기 동결과 전기·가스 등 에너지 요금의 인상 폭 및 속도 조절을 지시했다. 상황이 그만큼 심각하다. 사람들의 일상에서 떼놓을 수 없는 에너지의 가격 급등은 국가적 위기로 번지기 십상이다.
1978~1979년 영국을 아비규환 속에 빠뜨렸던 ‘불만의 겨울’ 대규모 파업사태도 2차 석유위기(1978년 12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이란의 석유 수출 중단으로 인한 국제 유가 급등)에 따른 에너지가격 급등이 주요인이었다. 20년 가까이 철옹성을 쌓았던 한국의 박정희 정권이 1979년 10월 붕괴한 원인 가운데 하나를 2차 석유위기에서 찾는 전문가들도 있다. ‘생존권 보장’을 외치며 야당 당사를 점거한 YH무역 여공들의 농성, 10·26의 결정타가 된 부산·마산 등의 시민항쟁 기저에는 유가를 필두로 한 물가 급등으로 피폐해진 민심이 농축돼 있었다는 것이다.
에너지가격 급등은 정치·사회적 폭발력이 그만큼 크다. ‘시장경제 복원’을 내건 윤석열 정부라도 눈앞의 현실을 외면할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다. 외부 요인에 따른 가격 상승을 마냥 억제할 요술방망이는 없다는 사실이다. 액화천연가스(LNG)와 석유 등 주요 에너지원(源)을 국제 시세에 연동한 가격으로 도입하고 있어서 특히 그렇다.
에너지를 해외에서 들여오는 국가들은 처지가 같은데, 한국만 제대로 된 인상을 미뤄왔다. 주택용 가스요금이 대표적이다. 원료인 LNG값이 지난 2년 새 10배 이상 치솟자 영국(318%), 독일(292%), 미국(218%) 등은 요금을 3~4배(2021년 1월~2022년 10월 기준) 인상한 반면 한국은 38.5% 올리는 데 그쳤다. 전기요금도 마찬가지다. 작년 한 해 이탈리아(107%), 영국(89%), 일본(35.6%), 미국(21.5%)이 큰 폭으로 올리는 동안 한국은 9.4%만 인상했다.
줄곧 원가보다 낮은 가격에 가스와 전기를 공급해온 국내 공기업들의 출혈이 더 커졌고, 정부의 재정 지원 확대가 불가피해졌다. 에너지를 쓴 당사자들이 상응하는 비용을 내지 않고 정부 보전에 의존하는 건 불공정한 일이다. 다른 나라들이 한국 정부보다 무능해서 요금을 대폭 올린 게 아니다. “물가는 물가로 잡는다”는 거시경제 전문가들의 격언도 있다. 정상적인 시장경제체제에서는 생필품이라도 값이 치솟으면 최대한 아껴 쓰며 수요를 조절하는 것으로 대응한다. 프랑스가 에펠탑 야간조명을 끄고, 독일이 공공건물의 난방온도를 섭씨 19도 이하로 제한한 이유다.
에너지요금을 억지로 묶어놓으면 이런 내핍을 이끌어낼 소지가 적다. 오른 요금을 견디기 힘든 저소득층과 영세 소상공인들에게는 맞춤형 개별 지원(에너지 바우처)을 해주는 게 올바른 대책이다. 가격 조작은 오래갈 수도 없을뿐더러, 시장을 왜곡의 수렁에 빠뜨릴 뿐이다. 윤석열 정부가 요금을 정상화해나가겠다고 선언했던 배경이다.
그런데 우려가 현실로 나타났다. 낮은 가격 수준에 중독돼 있던 사람들이 ‘정상화’ 초입 단계에서부터 금단증상을 일으켰고, 정부를 당황케 하고 있다. 정책 속도 조절을 결정한 고충을 이해 못할 바 아니다. 황당한 것은 에너지에 대한 사람들의 잘못된 인식이 뿌리 깊음을 보여주는 풍경이다. ‘전기세 폭탄’ ‘수도세 폭탄’. 지난주 물가 급등에 항의하며 용산 대통령실 앞에 모인 시위대가 팻말에 쓴 문구다. 전기와 수도 사용요금을 ‘세금’이라니.
‘요금’이면 사용한 만큼 비용을 내는 게 당연하지만, ‘세금’은 다르다. 그 차이를 모르지 않을 텐데 ‘전기세’ ‘수도세’로 부르는 저의가 뭘까. 그나마 ‘난방세’라고는 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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