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가장 매력적인 곳은 ‘모허 절벽’이다.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8일 여행을 기획하면서 모든 일정의 끝은 아일랜드 서쪽 대서양과 맞닿은 이곳에서 맺는다. 깎아지른 절벽의 높이는 214m. 용감하게 아래를 내려다봐도 그 깊이를 가늠하기 어렵다. 지도의 테두리 모양 그대로 굽어진 트래킹 길을 따라 탁 트인 대서양을 곁에 두고 걸어보자. 문득 하늘과 바다 사이에 얄팍하게 끼어들어 있는 육지와 나 자신이 마치 싸구려 샌드위치에 성의 없이 붙여둔 햄과 치즈처럼 하찮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만큼 웅장한 절경이 마음을 사로잡는다.
아일랜드의 하늘은 한국의 하늘보다 한참 더 아래로 내려와 있다. 그래서 하늘만 바라보고 있어도 시간이 바삐 흐른다. 조금만 몸이 가볍다면 뛰어올라 하늘을 손으로 한번 툭 쳐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다 구름인지 안개인지 모를 연무가 피어올라 코앞까지 뿌옇게 변한다. 절벽의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절벽과 거친 파도가 안개에 휩싸여 보이지 않을 땐 오히려 두려움이 말끔히 사라지는 기이한 경험도 할 수 있다.
바람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며 말을 건다. 좀 더 아래를 보라고, 조금만 바위 사이로 고개를 들이밀어 보라고. 그럼 이내 녹색 잔디인 줄만 알았던 그 사이로 하얀 꽃이 부석하게 마른 채 피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샴락 꽃이다.
한국에서는 흔히 클로버 또는 토끼풀이라고 부르는 그 삼색의 풀잎 사이로 피어난 꽃은 하얗고 작고 부석거린다. 하지만 그것이 이 꽃만이 가진 싱싱함의 표현이다. 빙하기를 보낸 거대한 바위 들판에서도 피어나는 강인한 꽃, 아이리시를 닮은 꽃. 그래서일까, 샴락이라고 하는 토끼풀이 아일랜드의 국화다. 이 길을 걷지 않았다면 어찌 이런 이유를 찾을 수 있었을까! 다른 여행자에게 살며시 샴락 이야기를 해준다. 여럿이 가도 혼자 갖는 여유와 자유시간이 있다. 누구에게나 자연이 건네는 이야기는 다른 속삭임으로 전해지기 때문이다.
항구 마을 둘린에 자리한 ‘오코너펍’은 손님들에게 ‘어부의 식탁’이라는 이름으로 식사를 제공한다. 매번 메뉴가 조금씩 바뀌지만 보통 여러 가지 생선을 푹 고아 만든 ‘차우더’와 발효하지 않고 갓 구운 ‘소다브레드’ 그리고 훈제 연어를 먹는다. 뱃사람들에게 익숙한 음식이자 주인이 손님을 대하는 최상의 호의를 표하는 음식이다. 아일랜드의 상징인 흑맥주도 한잔 곁들이면 좋다. 맥주가 아니어도 물잔을 들어 올리며 ‘슬론차!’를 외쳐본다. 아일랜드 사람들은 건배할 때 ‘슬론차’라고 외치는데, ‘건강을 위하여’라는 뜻이다. 현지인의 일상과 습관들을 잠깐이나마 흉내 내 보는 것만큼 즐거운 여행의 묘미가 또 있을까.
아일랜드에 살며 새해 주말엔 어김없이 모허 절벽으로 향한다. 지구 반대편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살았던 이에게 모허 절벽은 말을 건넨다. 안개에 휩싸였다가 어느새 환하게 갠 모허 절벽처럼 살면서 어떤 힘든 일 만나더라도 더 단단히 맞서고 두려워 말라고. 더 넓은 눈과 깊은 가슴을 품을 수 있는 사람이 되라고. 그렇게 조용히 외친다. ‘슬론차!’
▶이선영 가이드는
아일랜드의 한국인 최초이자 유일한 국가 공인 가이드다. ‘써니’라는 이름으로 현지인과 어울려 살며 현지의 숨은 장소들을 소개한다. 현지인보다 더 현지인 같은 유머와 위트로 2003년부터 다수의 TV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코디했다. 인문학 여행과 트래킹 등을 접목해서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잉글랜드, 아이슬란드까지 확장해 여행자를 만나는 이 지역 전문가다. 여행가이드 플랫폼 ‘가이드라이브’에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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