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 이후 양상은 완전히 달라졌다. ‘평생 고용’은 과거의 역사로 사라지고, ‘사오정’(45세면 정년) ‘오륙도’(56세에도 회사에 다니면 도둑) 등이 유행어로 자리잡았다. 대학을 막론하고 서열 최상위는 의대가 차지하게 됐다. ‘평생 자격증’을 따려는 수재들이 몰려든 결과다.
A도 대학 졸업 후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 취직했지만 미래가 불안했다. 2005년 퇴사 후 수도권의 한 의학전문대학원에 입학했다. 현재는 한 대형 병원에서 일하고 있다. 거의 10년을 돌아서 왔지만 “100세 시대에 정년 걱정 안 하고 일하는 게 어디냐”며 후회는 없다고 했다.
실제로 의대 열풍은 더욱 거세지고 있다. 2022학년도 정시 합격자의 성적 상위 20개 학과는 모조리 의대·치대·한의대였다. 대기업 취업과 연계된 연세대 등 주요 4개 대학 반도체학과는 총 47명 모집에 예비합격자를 포함한 합격자 73명이 이탈(등록포기율 155.3%)했다. 대부분 의대를 택한 것으로 파악된다. 대학은 6수, 7수를 해서라도 의대로 옮겨 가겠다는 반수생으로 넘쳐난다. 지난해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에서 자퇴한 학생 수만 1874명이다. 심지어 학원가에는 초등학생 의대 준비반까지 생겼다고 한다.
서울대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의사가 타 전문직을 압살하는 궁극의 전문직인데 대학 입시판에서 (의대가) 일반 학과와 경쟁하도록 하는 것 자체가 애초에 불공정 게임”이라는 글이 화제다. 이 글에는 “의사는 신이다, 외워라” “근 10년 중 의사의 최고 전성기”라는 댓글 등이 달리고 있다.
의대 열풍은 대통령실까지 우려하고 있을 정도다. 정부가 주력하는 반도체 등 첨단기술 인재 육성뿐만 아니라 교육 개혁, 건강보험 개혁 등 각종 개혁과제와도 맞물려 있다는 인식에서다. 대통령실은 근본적인 해결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각 부처가 논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어떻게 바꿔야 할까. 의대 열풍의 이면에는 근본적으로 ‘혁신’보다 ‘기득권’이 대접받는 우리 사회의 그림자가 자리잡고 있다. 의대 정원은 18년째 3058명으로 묶여 있다.
2020년 기준 한국의 의사 수는 인구 1000명당 2.5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꼴찌인 멕시코(2.4명) 다음으로 적다. 한의사를 제외하면 최하위다. 자격증과 정원 제한이라는 이중 울타리 속 의사들의 기득권은 갈수록 공고해지고 있다. 2020년 기준 국내 의사 평균 연봉은 2억3070만원으로 대기업 직원 평균(7008만원)의 세 배를 넘었다. 지방 의료원은 3억원대 연봉을 제시해도 의사를 구하지 못하는 사례가 나올 정도다. 반면 한국 최초의 우주발사체 ‘나로호’를 쏘아 올린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의 정규직 연구원 1인당 평균 보수는 9595만9000원(2021년 기준)에 불과했다.
타다, 로톡, 삼쩜삼 등 혁신 서비스가 기득권에 밀려 줄줄이 좌초 위기인 것도 무관하지 않다. ‘도전’보다 ‘안주’를 권하는, 또는 강권하는 사회에서 자격증의 몸값은 커질 수밖에 없다. 대통령실도 대한의사협회 등의 반발을 우려해 의대 정원 확대에는 부정적인 기류인 것으로 알려졌다. 기득권과 싸워봐야 선거에서 유리할 게 없다는 판단이 깔렸을 것이다.
바뀌어야 한다. 정부는 조속히 대대적인 이공계 활성화 방안을 발표해야 한다. 선발을 축소하고 있는 이공계 병역특례 전문인력요원을 확대하는 등 범부처적 대책이 필요하다. 윤석열 대통령부터 대학 반도체학과를 비롯한 이공계 현장을 직접 방문해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기득권 눈치를 보지 않는 대대적인 규제 개혁으로 혁신이 사회 곳곳에서 살아 숨쉬게 만드는 것이 필수다. 의대 정원도 과감히 풀어야 한다.
시간이 많지 않다. 선진국 인재들이 챗GPT를 개발하고 있을 동안 한국의 인재들은 챗GPT에 ‘의대 가는 법’이나 물어보고 있다면 더 이상 이 나라의 미래는 없다. 이 점에 있어선 A를 비롯한 다른 모든 의사도 아마 같은 생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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