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주나라에서는 80세를 ‘장조(杖朝)’라고 불렀다. 조정에서 지팡이를 짚고 다녀도 죄를 묻지 않는다는 뜻이다. 기력이 떨어져 임금 앞에서조차 똑바로 서지 못한다는 나이에 미술계의 시선을 사로잡은 작가가 있다. 그것도 두 명씩이나. 추상화의 곽훈과 행위예술의 성능경이다. 예술가로 평생을 보낸 ‘한국미술 1세대’ 원로 작가들이다. 곽훈은 한국 나이로 여든세 살이고 성능경은 올해 여든이 됐다. 이들의 전시는 예술에는 나이가 없다는 말을 실감 나게 한다. 젊은 작가들도 버거워하는 대작을 내놓는가 하면 국내외 유명 갤러리와 미술관에서 전위예술의 첨단을 선보인다.
지금은 이건용 장석원 등과 함께 ‘한국의 전위미술을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그는 지난 수십 년간 돈도 못 벌고, 인기도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너무나도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작품이어서다. 그래도 성능경은 멈추지 않았다. 남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지만 그에게는 반란이자 저항이었다.
그는 신문을 읽고 오리는 행위를 통해 군부정권의 ‘언론 탄압’을 비판했다. 담배 피우기 등의 행위를 통해선 근엄한 모습의 민중미술에 국내 미술계가 치중됐다며 경종을 울렸다. “저는 일상에 숨어있는 것, 눈길이 가지 않는 곳에 관심이 있습니다. 예술가는 모름지기 다른 쪽을 쳐다볼 줄 알아야 하거든요. 모두가 쳐다보고 있는 곳에 내가 숟가락 하나 더 얹을 필요는 없죠.”
성능경은 여든의 나이에 전성기를 맞았다. 평생 개인전을 다섯 번밖에 못 열었는데 올해에만 다섯 번의 전시를 앞두고 있다. 전시 장소도 화려하다. 국립현대미술관, 갤러리현대, 미국 뉴욕 구겐하임미술관, 리먼머핀뉴욕 등 쟁쟁한 국내외 미술관과 갤러리에서 열린다. 올해 전시회 시리즈의 첫 번째를 장식하는 백아트에서는 ‘끽연’(1976), ‘수축과 팽창’(1976) 등 1970·1980년대 초반 대표 사진 작품을 주로 볼 수 있다.
그는 명성에 안주하지 않았다. 회화, 설치, 도예 등의 작품을 선보이다 최근 몇 년간은 고대 이누이트족의 고래사냥에서 영감을 받은 추상화 ‘할라잇’ 연작을 선보이고 있다. 거칠면서도 힘 있는 붓질로 바다에서 튀어오르는 고래의 힘찬 움직임을 표현했다.
그의 작품에선 원로 작가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에너지가 느껴진다. 실제로도 곽훈은 열정적이다. 이번에 선보이는 신작 50여 점을 모두 직접 그렸다. 조수는 한 명도 두지 않았다. 그는 새벽 3시30분이면 일어나 운동한 뒤에 붓을 잡는다. 작품을 만드는 것보다 아이디어가 더 중요하다는 ‘개념미술’의 시대에 ‘아이디어만큼이나 손으로 직접 그리는 것도 중요하다’는 철학을 온몸으로 보여준다.
예화랑 1층에 전시된 가로 6.8m, 세로 3.6m 대작 ‘다완’(2023)이 좋은 사례다. 종이에 그려넣은 100여 개 찻잔이 전시장 한쪽 벽을 빈틈없이 채우고 있다. 동양적인 미가 느껴지는 작은 찻잔에 그는 무한한 우주를 담아냈다고 했다. “우리 세대가 손을 직접 쓰는 마지막 호모 사피엔스가 될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전시 제목을 ‘오마쥬 투 호모 사피엔스’라고 정한 이유도 그래서죠.” 곽훈 전시는 3월 31일까지, 성능경 전시는 4월 30일까지.
이선아 기자 sun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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