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후 첫 3·1절 기념사에서 일본과의 관계를 ‘파트너’로 규정하며 미래지향적 한·일 관계의 방향성을 제시했다.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 등 안보 위기에 한·미·일 3자 협력이 요구되는 상황을 감안한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면서도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배상 문제와 같은 민감한 사안에 대해선 발언을 자제했다. 양국의 막바지 협상이 진행 중인 상황을 고려할 때 일본 측에 포괄적 관계 개선 의지를 보여줬다는 평가가 나온다.
윤 대통령이 지난해 광복절 경축사에서 일본에 대해 “정치적 지배로부터 벗어나야 하는 대상이었던 일본은 이제 세계 시민의 자유를 위협하는 도전에 맞서 힘을 합쳐나가야 하는 이웃”이라고 규정한 발언과 같은 맥락이다. 진창수 세종연구소 일본연구센터장은 “작년에 비해 한·일 관계의 방향성을 더 선명하게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고 했다.
한·일 양국의 협력 필요성에 대해 윤 대통령은 “특히 심각한 북핵 위협 등 안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한·미·일 간의 협력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고 강조했다. 또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들과 연대하고 협력해 세계 시민의 자유 확대와 세계 공동의 번영에 기여해야 한다”며 “이것은 104년 전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외친 그 정신과 다르지 않다”고 했다. 자유를 지키기 위한 국제적 연대가 결국 3·1 운동 정신을 계승하는 것이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일본에 대한 사죄 및 과거사 반성 요구로 해석되는 내용은 기념사에서 모두 빠졌다. 이는 문재인 전 대통령이 2018년 첫 3·1절 기념사에서 일본에 대해 ‘위안부’ ‘가해자’ ‘반인륜적 인권 범죄’ 등의 표현을 쓰면서 반성을 촉구한 것과 대조된다. 일본 요미우리신문은 “과거 한국 대통령은 3·1절 기념사에서 일본에 주문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윤 대통령은 미래 지향을 강조했다”고 평가했다.
광복절 경축사 등에서 윤 대통령이 매번 강조했던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의 계승’ 등 언급이 제외된 것도 눈에 띄는 대목이다. 김대중-오부치 선언은 1998년 당시 김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 일본 총리가 발표한 공동선언으로, 일본의 ‘식민 통치에 대한 통절한 반성과 사죄’ 등의 문구가 명시돼 있다. 일각에선 진척이 더딘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협상을 의식한 조치라는 분석도 나왔다. 윤석열 정부가 당초 기대한 포괄적 한·일 관계 개선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김대중-오부치 선언에 대한 (대통령의) 평가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했다.
윤 대통령이 이번에 한·일 협력 의지를 분명히 했지만, 강제징용 배상 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지 한·일 관계가 빠르게 진전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예상이 많다. 이달 중으로 예상됐던 한·일 정상회담도 현재 성사가 불투명한 상황이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한·일 관계는 너무 서두르다 보면 예상치 못한 사건이 발생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다만 일본이 이번 윤 대통령의 기념사에 화답해 전향적인 입장을 보일 가능성도 열려 있다.
김동현/좌동욱 기자 3cod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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