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현실 칼럼] 한국은 미국에 '노(NO)'할 수 있는가

입력 2023-03-08 18:07   수정 2023-03-09 00:57

미국이 산업정책의 본색을 다시 드러냈다. 전기차 육성 등을 위한 인플레이션 감축법에 이어 미국 내 반도체 제조를 위한 칩스(CHIPS)법이 그렇다. 산업정책은 정부 개입을 일삼는 국가나 하는 하수(下手) 놀음이라고 비난하던 미국이 이럴 수 있느냐고 하겠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미국은 원래 산업정책의 DNA를 가진 나라다. 독립전쟁 후 알렉산더 해밀턴 미국 재무부 장관의 ‘제조업에 관한 보고서’가 그 상징이다. 영국 타도를 외친 국내 산업 보호론이다.

그 후 일본의 성장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차원에서 산업정책에 관심을 갖는 계기를 제공했다. 1970년대 오일쇼크 당시 선진국이 구조조정에 직면한 사이 일본이 치고 나간 배경이 궁금했던 것이다. 1980년대 미국에서 일어난 자유주의자와 개입주의자 간 뜨거운 논쟁은 그 연장선상이다. 일본의 위협을 묵과할 수 없다는 미국 내 개입주의자는 1990년대 빌 클린턴 행정부에서 화려하게 부활했다. 로라 타이슨의 ‘경제안보론’이 그것이다.

제조업에서 밀리던 미국이 정보기술(IT) 신경제로 주도권을 쥐자 세계는 다자 간 자유무역으로 가는가 싶었다. 1990년대 세계무역기구(WTO) 출범으로 보조금을 앞세운 각국 산업정책은 규범을 찾아가는 시기가 도래했다. 보조금 남발이 공정한 경쟁을 해치고 국제무역을 왜곡하면 안 된다는 논리에서였다. 이 규범하에서 미국은 세계 최고 연구개발 투자로 신산업 창출을 선도하며 부러움을 샀다. 미래 지향형 신산업정책이었다. 그러나 중국이 급부상하자 상황이 돌변했다. 미국은 WTO가 국익에 도움이 안 된다고 비토했고 다시 경제안보론이 등장했다. 첨단기술로부터의 중국 차단이 최우선 정책으로 올라섰다.

과거의 미국은 보수 공화당과 진보 민주당 간 정권이 교체되면 변화를 기대할 수 있었다. 지금은 아니다. 공화당은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권위주의로 크게 오염됐고, 민주당은 조 바이든 행정부 등장으로 민주사회주의 색깔이 짙어졌다. 여기에 양당 모두 ‘미국 예외주의’를 바탕으로 더 강하게 중국에 대응하는 게 정치적으로 유리하다고 판단하고 있어 경제적 개입주의가 득세하는 양상이다.

미국의 중국 때리기를 이해한다고 해도 문제는 그 강도와 파장이다. 미국은 반도체 공급 안정을 위해 한국과 대만 기업에 신규 투자를 통해 생산시설을 미국 내로 옮길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한국·대만은 지정학적 위험에 취약하니 안전한 미국이 낫다는 이유에서다. 미국 요구를 안보 청구서로 받아들이는 나라로선 불안하기 짝이 없다. 미국이 안보를 약속하면서도 만일의 사태를 대비한다는 의도로 읽히기 때문이다. 유사시 미국이 끝까지 동맹국을 지켜줄지 불신이 커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한국이 미국에 ‘노(NO)’라고 말할 처지도 못 된다. 1980년대 말 <‘노’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이란 책은 당시 기세등등하던 일본에 추락의 변곡점이 되고 말았다. 미국 안보에 의존해온 일본의 한계요, 오판이었다. 경우에 따라 미국에 ‘노’라고 할 수 있는 나라는 이스라엘, 사우디아라비아, 인도, 중국, 러시아 정도다. 미국에 큰 영향력을 갖고 있거나 전략적 레버리지를 보유한 국가들이다.

정부가 미국을 찾아가 협상을 해보겠다지만, 냉정히 말하면 읍소 수준일 것이다. 그래도 할 말은 하면 좋겠다. 미국이 이미 상실한 반도체 제조생산의 비교우위를 억지로 만들려는 산업정책은 성공하기 어렵다. 민족주의를 자극해 국가 간 산업정책에 불이 붙으면 과잉 생산 위험이 높아지고 결국 중국만 웃는 결과가 될지 모른다. 중국을 분절하는 경제 블록화로 가면 스태그플레이션 우려는 더 커지고, 전쟁 가능성은 그만큼 높아질 것이다. 과거 본국과 식민지를 묶는 약탈적 경쟁이 전쟁으로 비화한 중상주의 시대의 반복이 되고 만다.

미국 내 반도체 생산에 인센티브를 준다는 CHIPS법은 그 명칭과 달리 외국 기업에 해로운 규제를 강요하고 있다. 더구나 투자 기업에 지우는 각종 의무는 다음 대선을 의식한 민주당의 포퓰리즘 정치 이데올로기 그대로다. 산업정책이 정치 논리와 규제로 가면 동맹국 기업이라도 감수하기 어렵다. 돌파구를 찾는 한국 기업들은 이런 상황에서 국가가 왜 존재하는지 묻고 싶을 것이다. 유능한 정부는 아니어도 최소한 무능한 정부는 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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