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그려서 먹고산다는 건 말 그대로 ‘하늘의 별따기’예요. 첫 관문인 갤러리의 눈에 든다는 게 얼마나 힘든 것인지, 그림을 안 그려본 사람은 모를 겁니다.”
지난 7일 만난 우민정 작가(38)는 “그동안 수도 없이 ‘작가의 꿈을 접을까’ 고민했었다”고 토로했다. 국내 최정상 학교(서울대 동양화과 학부 및 대학원)를 나온 주목받는 신진 작가의 입에서 나온 말이 맞나 싶었다. 이유를 들어 보니 고개가 끄덕여졌다. “아무리 열심히 그려도 이름 없는 청년 작가에게 전시 기회는 좀처럼 안 옵니다. 작업실 월세를 내려면 ‘알바’를 뛸 수밖에 없죠. 그러면 그릴 시간이 없고, 전시할 작품도 부족해집니다.”
지독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은 것은 2년 전이었다. 정부가 지원하는 ‘예비전속작가’로 선정되면서 자신을 돌봐줄 울타리(화랑)를 갖게 됐다. 작지만 급여도 주고, 전시회도 열어주니 마음 편하게 그릴 수 있었다. 우 작가는 “국내 미술시장이 지난해 1조원을 돌파할 정도로 호황이라지만 젊은 작가에겐 딴 세상 얘기”라며 “한국 미술이 K팝처럼 세계를 호령하려면 신진 작가들이 꿈을 펼칠 최소한의 여건부터 마련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미술에선 갤러리가 소속사 역할을 한다. ‘전속작가’를 선정한 뒤 이들의 작품을 팔아주고, 다양한 조언도 해준다. 하지만 2021년 기준 국내 화랑(598곳) 중 전속작가 제도를 운영하는 화랑은 215곳(36%)에 불과하다. 전체 화랑의 63%가 연간 작품 판매 수익이 5000만원도 안 될 정도로 영세해서다.
현재 국내에서 전업작가로 활동하는 작가는 1000명 정도다. 매년 각 대학에서 배출하는 순수미술 전공자가 3000명이 넘는 것을 감안하면 문이 턱없이 좁은 셈이다. 이 중 젊은 나이에 갤러리의 눈에 드는 스타성 있는 작가는 거의 없다. 재능이 있어도 돈이 없으면 먹고살기 위해 다른 길을 찾을 수밖에 없는 구조란 얘기다. 미술계 관계자는 “K아트가 K팝처럼 되려면 재능 있는 신진 작가가 끊임없이 배출되는 시스템부터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이 제도는 유망 작가와 우량 화랑이 전속계약을 맺도록 중개하면서 화랑에 8개월간 월 100만원씩을 지원해주는 게 골자다. 화랑은 여기에 50만원을 얹어 작가에게 월 150만원을 건넨다. 매년 100여 명이 이 제도의 도움을 받아 ‘피카소의 꿈’을 키웠다.
효과는 확실하다. 지원받은 작가들의 1인당 작품 판매액은 1113만원(2019년)에서 2288만원(2022년)으로 두 배로 뛰었다. 중견 설치작가인 민성홍은 “재료비를 확보한 덕분에 안정적으로 하고 싶은 작업을 할 수 있게 됐다”고 했다. “지원금으로 새로운 작업을 시험해본 덕분에 작품 세계가 깊어졌다”(보킴), “마음에 여유가 생겨 그림에 더욱 집중할 수 있게 됐다”(지심세연)는 얘기도 들렸다. 스페이스소 화랑의 송희정 대표는 “지원받은 후 작품 수준이 높아진 작가가 많다”고 했다.
최혜연 문체부 시각예술디자인과 사무관은 “성과가 있는 것으로 판단해 올해부터 지원 기간을 1년에서 3년으로 늘렸다”고 말했다. 다만 수요에 비해 지원 규모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게 미술계의 평가다. 양지연 동덕여대 큐레이터학과 교수는 “예비전속작가제는 미술시장의 기초체력을 키울 수 있는 ‘가성비 좋은 제도’”라며 “좋은 작가와 화랑을 키워야 한국이 순수예술 분야에서도 강국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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