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re are you from"이 금기어?…'정체성 정치'의 그늘 [노경목의 미래노트]

입력 2023-03-10 08:00   수정 2023-03-10 08:04


최근 미국에서는 "고향이 어디냐(where are you from)"이라는 일상적인 인사말이 부정적으로 인식되고 있다. 고향이 미국이 아닌 사람들을 곤란하게 한다는 이유에서다.

이슬람 등 기독교를 믿지 않는 종교인들을 불편하게 한다는 이유로 크리스마스 축하 인사를 주고 받는 것이 금기시되고, 디즈니 등 미디어 대기업은 서양 동화의 주인공도 백인이 아닌 인물을 기용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이는 미국에서는 이미 중요한 정치적 갈등의 진앙으로 떠올랐다. 전통적인 보수·진보간의 의제 대신 성·인종·지역·계급 등으로 분화된 집단의 권리 보호를 우선시하는 '정체성 정치'다.

정체성 정치가 지배하는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그리고 어떤 지점으로 진영이 갈리고 논쟁하게 될까. 벤 샤피로의 <권위주의적 순간>은 여기에 힌트를 준다.
우파보다 무서운 좌파 권위주의

저자인 벤 샤피로는 미국 보수진영의 새로운 리더로 부상하고 있다. 만 39세로 하버드 로스쿨 출신인 샤피로는 최근 진보 진영과 사이의 갈등을 '문화 전쟁'으로 규정하며 저술과 강연을 통해 활동하고 있다. 2015년에는 '데일리와이어'라는 온라인 매체를 설립하기도 했다.

문화전쟁을 통해 샤피로가 공격하는 정체성 정치는 낙태나 동성애, 분배정책 등 정치적 입장에 대한 것이 아니다. 샤피로는 낙태 등에 대한 입장이 자신과 같지 않더라도 정체성 정치에 대해서는 함께 반대할 수 있다고 본다.

샤피로에 따르면 정체성 정치는 표현의 자유 자체를 제약한다는 점에서 가장 큰 문제가 있다. 책의 제목인 '권위주의적 순간'은 역시 좌파 권위주의가 헤게모니를 장악해 표현의 자유가 질식하는 시점이다.

미국적인 가치를 부정하는 좌파의 시도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 자체를 봉쇄하려는 움직임을 샤피로는 좌파 권위주의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는 트럼프 지지자들의 의사당 점거 등 눈에 보이는 우파 권위주의보다 더욱 위험하다고 주장한다.

아울러 우파 인사들과의 대화 자체를 금기시하고, 해당 인사와 교류한 사실이 알려지면 단체로 공격하는 행위 역시 좌파 권위주의의 사례라고 샤피로는 말한다. 인종이나 성별 차별의 소지가 있는 특정한 단어를 사용했다는 이유로 사내 다양성 교육을 받거나, 낮은 인사고과를 받는 것 역시 좌파 권위주의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한다.

대학 교육부터 실리콘밸리 대기업까지 좌파 권위주의가 득세하면서 그들의 주장에 대한 문제제기 자체가 봉쇄됐다고 비판한다. 의문을 제기하는 행위를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규정하면서 누구도 목소리를 내지 못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샤피로는 권위주의에 반대하는 자유주의자나 좌파 성향 인물들과는 연대할 의사가 있다고 밝힌다. 2020년 6월 J.K.롤링과 노암 촘스키 등 153명의 자유주의자가 발표한 합동성명을 그가 '고무적인 현상'이라고 평가한 이유다.

성명에서 촘스키 등은 "나쁜 주장을 물리치는 방법은 주장의 문제점을 드러내고, 토론하며 상대방을 설득하는 것이지 그들을 묵살하고 사라지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다"고 했다.
눈길 끌지만 거친 논리
책 내용의 상당 부분은 좌파 권위주의자들이 어떻게 득세했는지를 다루고 있다. 이들의 전략을 알아야 대항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해당 논리 전개는 상당히 거칠게 이뤄져 설득력이 낮다.

샤피로는 정체성 정치의 뿌리가 루스벨트부터 린든 존슨, 지미 카터까지 미국 민주당의 주요 정치인과 함께 이어져 왔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2010년대부터 활발하게 퍼진 것에 대해 오바마 전 대통령이 여성과 성 소수자, 이민자 등 비주류를 규합하는 '교차성 연대'를 통해 재집권에 성공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정작 2기 오바마 행정부에서 정체성 정치의 확산을 위해 어떤 활동을 했는지에 대한 설명은 빠져 있다. 교차성 연대라고 비판한 내용도 미국의 인종 다양화에 대응한 선거 전략의 변화로, 이것이 곧 정체성 정치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샤피로는 좌파 권위주의 세력이 대학을 장악하면서 대학이 정체성 정치를 재생산하는 곳이 됐다고 비판한다. 대졸자와 비대졸자 사이의 격차가 벌어지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상당히 논쟁적인 말이지만 여기에 대한 근거는 충분히 제시하지 않고 있다. 그런 점에서 <권위주의적 순간>은 이론서보다는 정치 팜플렛으로 분류하는 것이 알맞을 듯 하다.

샤피로는 '좌파 권위주의자가 상대를 설득하기 위한 언어가 아니라 지지자를 규합하는 언어만 사용하고, 그런 점에서 종교와 비슷하다'고 공격하고 있다. 하지만 책 내용만 보면 샤피로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은 듯 하다.

당장 좌파 권위주의자와 대결하기 위해 그들의 전술을 배우자고 주장한다. 식구 중 한명이 채식주의를 오랫동안 고수하면, 이에 따르지 않던 이들도 불편함 등으로 자연스럽게 동화되듯 소수의 좌파 권위주의자들이 자연스럽게 미국 사회 전체를 물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어떤 난관에도 자신의 입장을 굽히지 않고 주장할 수 있는 강력한 사상 집단이 필요하다. 이같은 집단의 조직을 통해 샤피로가 의도하듯 좌파 권위주의에 타격을 입힐 수 있겠지만, 사회 전체로는 갈등과 혼란이 지속될 수 밖에 없을 듯 하다.
한국은 어떨까
여러 문제점이 있고, 샤피로의 주장에 동의되지 않는 부분도 많지만 현재 미국에서 제기되는 여러 이슈와 관련 논의를 요약해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일독할 가치는 있다.

사실 오늘날 한국에서도 일상을 지배하는 상당수 정치적 갈등은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 영남과 호남 사이에 있지 않다. 남혐(남성 혐오)과 여혐(여성 혐오) 사이에 있고, 사대남(40대 남자)과 이대남(20대 남자) 사이를 가른다. 심지어 어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활동하는가, 어떤 개그 코드를 좋아하는가도 일종의 정치적 표현이 된다.

아직 주류 정치 이슈로 부각되지 않았기 때문에 제도화되지 않은 정치적 갈등이다. 이같은 이슈들이 전면에 부상했을 때 한국에서는 어떤 양상으로 전개될지 상상할 수 있게 한다는 점도 이 책의 또다른 의미다.

노경목 기자 autonom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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