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껏 아버지만큼 삼국지(三國志)를 탐독한 이를 보지 못했다. 아버지는 일본을 대표하는 소설가 요시카와 에이지(吉川英治)가 쓴 삼국지 번역본을 읽었다. 가끔 보면 밑줄을 긋기도 하고 여백에 메모를 깨알같이 했다. 결혼해서 한집에 살 때다. 출근 인사를 드리자 갑자기 삼국지 일본어판을 구해오라고 했다. 동경에 있는 친구에게 부탁해 며칠 걸려 구해드렸다. 그러고 얼마쯤 지나 나관중(羅貫中)의 삼국연의(三國演義) 중국어본을 대만에 있는 지인을 통해 구해드렸다. 그때 아버지는 책 심부름시키는 게 마음에 걸렸는지 “‘삼국지를 읽지 않고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는 말도 있지 않으냐”고 했다. 월탄(月灘) 박종화(朴鐘和)의 월탄삼국지(月灘三國志)를 구해드리자 비로소 만족해했다.
아버지 방을 청소하다 깜짝 놀랐다. 책 네 권을 펴놓고 노트에 삼국지를 만년필로 새로 쓰시고 있었다. 이미 다른 노트에는 등장인물별로 발언록을 따로 만들어 놓은 걸 보고 많이 놀랐다. 책에 다 적지 못한 번역 오류 등을 바로잡은 노트도 있었다. 적어도 몇 달은 족히 걸렸을 작업량이었다. 심하게 놀란 건 달력 뒷면을 이어붙여 삼국지에 나오는 모든 전투상황도를 그린 지도를 보고서였다.
외출했다 돌아온 아버지에게 “대단하십니다”라며 삼국지를 여쭙자 밤을 밝히며 하신 말씀이다. “번역서로는 월탄의 글이 좋다. 요시카와는 독자를 너무 많이 가르치려 한다. 그래서 내가 삼국지를 새로 쓰고 있다. 나관중이 저지른 실수도 여럿 있다. 특히 역사는 당시 인물이 겪은 바를 독자가 따라 해보는 방식의 추체험적(追體驗的) 기술을 해야는 데 소설적 가미가 너무 심하다”라고 평했다. 아버지는 “삼국지 현장을 일간 좀 다녀왔으면 좋겠다”라고 했으나 몇 년 지나 뇌출혈로 쓰러지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아버지는 “삼국지 주인공은 조조(曹操)다. 등장인물 중에서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를 모두 기술된 유일한 인물이다. 발언량도 최고 많고 걸물 중에서는 가장 인간적이고 실수도 많이 해 정이 간다”라면서 “‘사람들은 어제 조조를 잘못 보았다, 오늘도 잘못 본다. 어쩌면 내일도 잘못 볼 것이다. 그러나 나는 두렵지 않다. 나는 나니까’라는 조조의 말이 참 좋다. 그는 임종 직전 이 말을 하고 물을 가져오게 하고 마시지를 못하고 손으로 튕긴다. 마치 자신의 인생을 의미하듯이. 닮고 싶은 멋있는 삶이다”라고 했다.
그날도 어김없이 인용한 고사성어가 ‘위기지학(爲己之學)’이다. ‘자신을 위한 학문을 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공자(孔子)가 논어(論語)의 헌문(憲問) 편을 통해 “옛날에는 자기 자신을 위해 학문을 했는데, 오늘날에는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한 학문을 한다[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 ]”라고 질타하며, 학문하는 이유를 크게 위기지학과 ‘위인지학(爲人之學)’으로 구분했다. 아버지는 “위기지학은 학문을 통해 자신을 성찰하고 인격을 수양하여 자신의 도덕적 완성을 추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즉, 공부 그 자체가 목적이다. 위인지학은 자신을 과시하고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기 위해 학문을 하는 것이어서 공부가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이 학문의 목적은 입신양명과 부귀영화를 얻으려는 데 있다”라고 했다.
말을 마칠 즈음에 아버지는 “너를 위해 살아라. 너를 발견하고 온전한 네 삶을 살아라. 직장에서 일하니 직장에서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언제까지나 직장에 있을 수는 없다. 조조처럼 죽을 때 저런 말을 할 수 있을 때까지 자신의 공부를 집요하게 해라”라고 했다. 아버지는 조조가 한 말인 “산은 영원히 그 높음에 만족하지 않고, 물은 영원히 그 깊음에 만족하지 못한다[山永不滿足於其高, 水永不滿足於其深]”를 옮기며 공부 방법으로 집요성(執拗性)을 제시했다. 그런 성정이 몸에 배도록 노력할 것을 요구했다. 그 또한 손주들에게도 물려주고 싶은 품성이다.
<한경닷컴 The Lifeist> 조성권 국민대 경영대학원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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