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4월 미국 하원 금융위원회에 출석한 미국 7대 은행의 최고경영자(CEO)들은 이런 질문을 받았다. 아무도 손을 들지 못했다. 참석자들은 모두 백인 남성이었다. 미국 경제매체 포천은 당시 상황에 대해 “입을 굳게 다문 남성 CEO들의 모습은 월가에 여성 수장이 나오는 게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잘 보여줬다”고 전했다.
굳건해 보이던 이 천장은 2020년 한 여성에 의해 깨졌다. 제인 프레이저 씨티그룹 글로벌소비자금융 대표가 CEO로 발탁되면서다. 2021년 정식 취임하면서 프레이저는 미국 주요 은행 최초의 여성 CEO가 됐다. 포천은 “가장 높고 가장 단단한 월가의 유리천장이 깨진 순간”이라고 보도했다.
그는 식견을 넓히기 위해 스페인에 있는 컨설팅회사인 아세소레스부르사틸레스로 옮겨 2년간 애널리스트로 근무했다. 이후 1994년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에서 MBA(경영학 석사)를 취득하고 맥킨지앤드컴퍼니 등을 거쳐 2004년 씨티그룹에 입사했다.
씨티그룹에서 프레이저는 회사가 어려울 때마다 ‘해결사’ 역할을 하며 역량을 인정받았다. 씨티그룹이 글로벌 금융위기로 미국 정부로부터 450억달러 상당의 구제금융을 받았을 당시 프레이저는 글로벌 전략 및 인수합병 책임자 자리에 올랐다. 자산관리 및 보험판매 사업부인 스미스바니를 모건스탠리에 매각하는 등 각종 개혁을 꾀했다.
2013년에는 모기지 금융을 개편하고, 2015년에는 회계 부정 스캔들에 휘말린 라틴아메리카 사업부의 책임자를 맡아 재무 실적을 개선했다. 그의 재임 기간 중 라틴아메리카 사업부의 순수입과 순이익은 각각 8%, 38% 증가했다. 2019년 씨티은행장 겸 글로벌소비자금융 대표로 승진했고 2020년 차기 CEO로 임명돼 2021년부터 임기를 시작했다.
예컨대 그는 골드만삭스에서 맥킨지로 자리를 옮긴 배경을 두고 “가정을 꾸리고 싶었기에 조금 더 예측할 수 있는 컨설팅 분야로 자리를 옮겼다”고 밝혔다. 이어 “임신한 뒤 더 어린 사람들이 빠르게 치고 올라가는 것에 약간 힘들었지만 결론적으로는 행복한 선택이었다”고 덧붙였다.
프레이저는 부족한 점을 인정하는 공감이 자신의 강점이라고 말한다. 그는 “나는 특정 분야에서 더 취약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내가 절대로 부드럽거나 약하다고 느끼지 않는다. 공감은 나약한 게 아니라 강점이다”고 강조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프레이저를 두고 “남성 리더들을 모방하려는 여성 동료 사이에서 차별점이 두드러졌다”고 평가했다.
CEO 자리에 오르고 그는 경쟁사 대비 취약한 소매금융 영업을 세계 14개 시장에서 중단하고 자산관리 사업을 강화하는 등 체질 개선에 걸음을 뗐다. 하지만 지금까지 씨티그룹의 실적은 좋지 않다. 투자은행 관련 부문이 미 중앙은행(Fed)의 긴축으로 쪼그라들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4분기 씨티그룹의 투자은행 부문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58% 감소한 6억4500만달러로 애널리스트 예상치(7억2200만달러)를 밑돌았다.
그러나 프레이저는 당장의 성과보다는 장기적인 전략 수립에 힘을 쏟을 것이라는 의지를 보였다. 지난 1월 프레이저는 “씨티그룹은 앞으로 몇 년간 경쟁사들보다 뒤처질 것”이라며 “하지만 장기적인 가치를 창출하도록 전략을 수립하는 것이 옳다”고 했다.
박주연 기자 grumpy_cat@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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