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에게 결혼은 여러 선택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주변에선 ‘결혼 못 하면 루저’로 바라보는 게 안타깝다. 부모님부터 친척, 사회에서 만난 어르신까지 부지런히 내게 결혼을 설득한 지 5년이 훌쩍 넘었다. 그럴 때마다 논리적인 반박, 필요 이상의 분노, 무대응 등으로 반응했다.
처음 ‘결혼 잔소리’를 들었을 땐 20대 후반에 들어섰음을 체감했다. 많은 이가 “내년이면 너도 서른”이라며 소리 없는 억압을 해 왔다. 당시 주변 친구들도 하나둘 결혼했고, 결혼에 대한 가치관조차 없던 나는 그들을 신기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결혼에 대해 마음이 내키지 않았기에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낼 수 있었다.
갓 서른을 넘겼을 때 결혼 잔소리에 대한 스트레스는 최고조에 달했다. 걱정스레 말씀하시는 부모님의 전화 목소리가 죄송하지만 듣기 힘들 정도였다. 이제 겨우 쓸모있는 직장과 전문 분야를 찾아 경력을 쌓고 있고, 부모님의 지원 없이 경제적 독립도 가능해졌는데, 단지 결혼하지 않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내 인생은 여전히 ‘걱정되는 존재’로 여겨지는 듯했다. 10대 사춘기가 재발한 듯 결혼의 ‘결’자만 들려도 부모님께 상처를 드릴 만큼 짜증과 화를 냈다. 필요 이상으로 예민했던 원인으로는 잔소리 이상의 성숙하지 못한 억울함이 섞여 있었다.
서른 중반이 돼 가니 내 상태는 그다음 단계에 돌입했다. 20대 후반에는 저절로 한 귀로 잔소리를 흘려보냈다면, 이제는 코로나19에 걸렸을 때의 아픈 목구멍으로 겨우 침을 삼키듯 잔소리를 흘려보내려고 노력한다. 듣기 싫은 건 여전하기 때문이다. 내가 별 타격 없어 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다들 시시해하며 두 번 말할 잔소리를 한 번만 하게 된다. 억지로라도 해탈한 표정을 띤 채 한 귀로 흘리다 보면 실제로 스트레스가 반감되는 것도 경험할 수 있다. 그렇게 올초 가족과 친척이 모인 자리는 잘 넘어갔다.
그동안 필자는 가장 친한 친구의 딸이 성장하는 과정을 지켜봤다. 회사에서는 매일 아이 등원을 챙기며 일도 잘하는 동료에게 진심 어린 존경을 보낸다. 그러면서 스스로 결혼과 출산에 대한 가치관을 만들어가는 중이다. 그럼에도 “결혼 언제 할래”에 대한 소리를 들으면 더 하기 싫은 ‘청개구리 심보’는 여전하다.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나를 아끼는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이여, 조금만 더 너그럽게 기다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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