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의 여행은 작은 보트에서 시작됐습니다. 저는 난민캠프에서 할리우드의 가장 큰 무대까지 왔어요. 이것이, 이것이야말로 ‘아메리칸 드림’이지요.”
미국 로스앤젤레스 돌비극장에서 12일(현지시간) 열린 제95회 오스카(아카데미) 시상식장은 자주 눈물바다로 변했다. 베트남 전쟁으로 난민캠프에 머물다 미국으로 건너온 키 호이 콴(사진)은 남우조연상을 받고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는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서 양쯔충(楊紫瓊)이 연기한 미국 이민 1세 에벌린의 남편 역할을 맡았다. 61세의 나이에 동양인 최초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양쯔충도 눈물을 삼켰다. 부상과 우울증 등으로 대중의 기억 속에서 밀려났다가 남우주연상을 받은 브렌던 프레이저도 울먹였다.
미국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가 주관하는 오스카는 미국 영화계 최고의 시상식으로 꼽힌다. 올해 시상식의 주인공은 ‘아메리칸 드림’을 소재로 삼은 영화 에브리씽이었다. 에브리씽은 오스카 최고 영예인 작품상을 포함해 감독상 각본상 여우주연상 남우조연상 여우조연상 편집상 등 7관왕을 차지했다.
에브리씽은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미국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는 중국계 미국인 에블린과 그의 가족 이야기를 담았다. 에블린은 우연히 멀티버스라는 다른 세계에 수만 명의 자신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위기에 빠진 세상과 가족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에브리씽은 중국계 미국인 감독 대니얼 콴 감독에게 감독상(공동연출 대니얼 샤이너트 공동 수상)을 안겼다. 작품, 감독, 배우가 모두 아메리칸 드림을 이뤄낸 셈이다. 윤성은 영화평론가는 “작년 개봉작 중에서도 가장 창의적이면서 감동적인 작품이었다”며 “자칫 B급 판타지 영화로만 치부될 수 있었던 이 작품의 가치를 알아본 것 자체가 오스카의 놀라운 변화를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에브리씽은 최다 부문 후보에 올라 일찌감치 화제가 됐다. 작품상과 감독상 등 총 10개 부문·11개 후보(여우조연상 부문 후보 2명)에 올랐다. 독일의 반전(反戰)영화 ‘서부 전선 이상 없다’, 영국 출신의 마틴 맥도나 감독의 블랙 코미디 ‘이니셰린의 밴시’도 각각 9개 부문 후보에 올라 접전을 펼쳤지만, 에브리씽이 트로피를 싹쓸이했다.
2020년 봉준호 감독이 ‘기생충’으로 4관왕을 차지한 것을 계기로 오스카 무대에서 두드러진 아시아권 영화의 강세가 올해는 에브리씽으로 이어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허남웅 영화평론가는 “이토록 다양한 사연을 가진 사람들과 이토록 다양한 국적을 가진 사람들이 시상대에 오른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라며 “오스카가 추구하는 다양성이 에브리씽을 중심으로 보다 입체적으로 구현됐다”고 평가했다.
양쯔충이 ‘TAR 타르’의 케이트 블란쳇을 제치고 동양인 최초로 여우주연상을 차지한 것도 의미가 깊다. 그는 1980년대 홍콩영화 ‘예스 마담’ 시리즈 등에 출연했으며, 1997년 ‘007 네버 다이’에서 본드 걸을 연기하며 할리우드에서 활동해 왔다. 양쯔충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전성기가 지났다고 말하는 사람을 절대 믿지 마세요. 제 어머니께, 세계의 어머니들에게 이 상을 바칩니다.”
이번 시상식에선 한국 작품과 배우를 찾아볼 수 없어 아쉬움을 남겼다. 영화 ‘기생충’(2020)과 윤여정 배우(2021)가 잇달아 수상의 영광을 안았지만, 올해는 ‘헤어질 결심’이 최종 후보에도 오르지 못했다. 아시아계 작품 중 에브리씽이 관심을 독차지한 점, 전쟁과 역사 등과는 거리가 먼 로맨스를 소재로 삼은 영향이 큰 것으로 알려졌다.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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