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제3자 징용 배상안을 들고나온 것은 이런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끊기 위한 고육책이라고 대통령실은 강조한다. 어찌 보면 윤 대통령의 선(先)제안은 냉엄한 국제 질서 속에 선택할 수밖에 없는 수(手)다. 대중 봉쇄를 위해 ‘올코트 프레싱’하고 있는 미국은 인도·태평양 전략을 위해서라도 한·일 균열을 메워야 한다. 방미를 앞둔 윤 대통령으로선 대북 억지력 강화와 반도체 지원법·인플레이션 감축법(IRA) 문제 해결이 다급하다. 올해 70주년을 맞은 한·미 동맹 업그레이드는 필수고, 한·일 개선은 그 전제다. 한·미가 이례적으로 북한 턱밑인 임진강에서 도하훈련을 하는 등 최대의 억지력을 과시하고 있는데, 한국의 한·일 관계 개선 의지가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한·일 안보 협력도 다급하다. 정상화되는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은 북한 미사일과 잠수함 탐지에서 매우 중요한데 일본이 우위에 있다. 군사용 정찰위성은 한국에는 한 대도 없는 반면 일본은 9개가 북한 핵실험장과 미사일 기지를 훑고 있다. 한국에 4대밖에 없는 공중조기경보기를 일본은 17대 갖고 있다. 지난해 북한이 극초음속미사일을 발사했을 때 일본은 발사 및 탄착 지점 모두 한국보다 정확하게 파악했다. 잠수함 탐지 해상초계기는 한국이 16대, 일본은 100대가 넘는다. 북한 잠수함이 동해 밑을 휘젓고 다닌다면 일본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일본은 한국 유사시 미군의 후방기지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도 지소미아는 필수다. 양국 간 경제적 긴밀도는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일본의 수출규제로 지난해 한국의 일본산 소재·부품·장비 수입 비중이 역대 최저 수준으로 떨어진 반면 대중 의존도는 더 높아졌다.
이번 윤 대통령 방일로 경제·안보 새 틀을 짤 바탕을 마련했지만, 지뢰는 양국 내부 정치에 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징용 폭탄이 터졌는데도 방기해버렸고, 20조원의 경제 효과를 날려 보냈다. 더불어민주당은 이런 무책임함을 넘어 ‘삼전도 굴욕’ ‘숭일(崇日)’ ‘일본 하수인’ 등 온갖 말초적인 신조어로 얕은 감성을 부추기는 데만 혈안이다. 외교는 이상을 좇되 현실에 발을 디뎌야 한다. 나라 간 협상은 결국 50 대 50 게임이다. 양측 모두 51을 얻었다고 생각하게 할 뿐이다. 민주당 정권은 이런 현실은 외면한 채 100이란 이상만을 좇다가 한·일 관계를 파탄으로 몰았다. 석고대죄해도 모자랄 판에 지소미아 복원 등을 두고 ‘자위대 한반도 진주’ 운운하며 뻥튀기 거짓 선동을 벌이며 반일 마케팅을 이재명 대표 사법 리스크 회피 수단으로 삼는 데만 급급하다.
처칠의 위대한 말처럼 과거와 현재가 싸우면 미래가 희생될 뿐이다. 한·일 문제는 욕 한번 내뱉고 마는 감정 카타르시스 대상일 수 없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김대중-오부치 선언’ 때 일왕이 아니라 천황으로 불렀다. “50년도 안 되는 불행한 역사 때문에 1500년에 걸친 교류와 협력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셔틀 외교를 성사시켰다. 이 대표는 이들에겐 왜 ‘하수인’ 딱지를 붙이지 않나. 원내 제1 당이라면 대안이라도 내놓고 시시비비를 가리는 게 정상이다. 이 대표는 국민을 설득할 용기와 배짱이 없다면 나라 지도자가 될 자격이 없다. 언제까지 다 쓴 치약을 눌러 짜내듯 과거를 빼내려 할 건가. 윤 대통령도 한·일 관계 개선 명분이 중요하더라도 감성적 영역이 큰 만큼 국민에게 이해를 구하는 노력을 병행해야 한다.
일본도 달라져야 한다. 윤 대통령은 일본에 현찰을 내줬고, 일본은 갚아야 할 어음으로 답했다.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앞으로 구체적인 결과를 하나씩 내겠다고 여러 번 강조했다. 어음이 부도나지 않게 해 한국 야당의 ‘망국 야합’ 주장을 부끄럽게 해야 한다. 윤 대통령이 ‘지지율 1%’까지 각오했다고 하는데, 그만큼의 용기만 내도 진전할 수 있을 것이다. 어렵게 찾아온 기회다. 또다시 ‘사죄-망언’으로 점철된 지난 60년의 질곡 속으로 빠져들게 해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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