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같은 내 돈 날릴라"…경제 위기마다 반복되는 '뱅크런'

입력 2023-03-20 18:02   수정 2023-03-21 00:19

일제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고 하루가 지난 1945년 8월 16일 경성(서울) 시내 은행마다 긴 줄이 늘어섰다. 본국으로 돌아가려는 일본인들이 예금을 찾으려고 은행에 몰려든 것이다. 너도나도 돈을 빼내면서 은행권 예금은 해방 후 한 달여 만에 반 넘게 줄었다. 한국 은행사 최초의 뱅크런(bank run)이었다. 뱅크런을 막기 위한 조선은행(현 한국은행)의 통화 증발과 뒤이은 인플레이션은 가뜩이나 불안정했던 해방 정국에 혼란을 더했다. 최근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에서 보듯 뱅크런은 경제가 불안해지고 금융시장이 흔들릴 때마다 데자뷔처럼 반복된다.

합리적 선택의 비합리적 결과
뱅크런이란 예금자들이 한꺼번에 돈을 찾아가는 대규모 예금 인출 사태를 말한다. 금융시장 충격이나 은행 건전성 악화 등으로 불안감을 느낀 사람들이 황급히 예금을 인출하려고 할 때 발생한다. 뱅크런이 일어나면 은행은 지급준비금이 바닥나 파산에 이를 수 있다.

요즘에는 은행(bank)에 달려가지(run) 않아도 예금을 인출할 수 있다. 그래서 이번 SVB 뱅크런을 두고 ‘스마트폰 뱅크런’ 혹은 ‘뱅크탭(tap·스마트폰 화면을 두드리다)’이라고도 한다.

뱅크런은 은행이 망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실제 은행 파산으로 이어지는 공포의 자기실현이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예금자는 필요할 때 필요한 만큼만 돈을 꺼내고 나머지는 은행에 넣어둔 채 이자를 받는 것이 합리적이다. 은행이 부실 징후를 보이면 얘기가 달라진다. 서둘러 예금을 인출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머뭇거리다가는 돈을 못 찾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판단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뱅크런이 일어나고 은행은 파산으로 치닫는다. 자신의 예금을 지키려는 개인의 합리적 행동이 집단적으로는 불합리한 결과를 낳는 구성의 오류다.

뱅크런의 또 한 가지 무서운 점은 전염성이 강하다는 것이다. A은행에서 뱅크런이 발생하면 그 여파는 A은행에 국한되지 않는다. B은행 예금자도 불안감을 느끼고 예금 인출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 멀쩡한 은행도 위기에 빠질 수 있는 것이다.
동서고금의 뱅크런
역사를 돌아보면 주요 경제위기마다 뱅크런이 동반됐다. 1907년 미국에서 일어난 경제공황은 니커보커신탁회사의 뱅크런이 도화선이 됐다. 이 사건을 계기로 금융위기를 막을 ‘최종 대부자’의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미국 중앙은행(Fed)이 탄생했다. 1930년대 대공황 때도 수많은 은행이 뱅크런을 맞고 도산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는 미국 워싱턴 뮤추얼, 와코비아, 영국 노던록은행 등에서 뱅크런이 있었다. 재정위기를 겪은 그리스에선 2015년 6월 하루 10억~15억유로씩 예금이 인출됐다.

한국에서는 외환위기 때인 1998년 1월 초 사흘 만에 종합금융회사 예금 1조1000억원이 빠져나갔다. 당시 종금사 개인 예금의 38% 규모였다. 이후 금융 구조조정 과정에서 종금사라는 업태 자체가 사라졌다. 2011년 2월엔 부실 저축은행이 무더기 영업정지를 당하면서 전국 저축은행에서 하루 수천억원의 예금이 인출됐다.
예금보험제도와 최종 대부자
뱅크런을 막기 위한 장치로는 예금보험제도와 중앙은행의 최종 대부자 기능이 있다. 예금보험제도는 은행이 파산했을 때 고객의 예금을 국가가 대신 지급해 주는 제도다. 예금을 받는 금융회사는 예금보험에 의무적으로 가입하고, 일정액의 보험료를 낸다. 이 보험료로 기금을 조성해 은행 파산 시 고객에게 예금을 지급한다.

예금보험제도의 단점은 도덕적 해이를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이다. 정부가 예금 지급을 보증해 주면 예금자들은 은행의 부실 여부를 꼼꼼히 따지지 않고 돈을 맡길 가능성이 있다. 은행 역시 자금을 신중하게 운용할 동기가 약해진다.

최종 대부자 기능이란 지급준비금이 바닥난 은행에 중앙은행이 자금을 빌려주는 것을 말한다. 최종 대부자 기능 역시 ‘망하면 구제해 준다’는 식의 도덕적 해이를 유발할 위험이 있다.

유승호 기자 ush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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