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9세기 유럽의 지성인들은 그들 문명의 뿌리를 찾아 이탈리아 등 유럽 남부로 향했다. ‘그랜드 투어’라고 불린 이 같은 장기 여행을 위해선 많은 준비가 필요했다. 짐을 실을 수 있는 마차와 마부를 미리 섭외해야 했고, 도시마다 묵을 곳도 찾아놔야 했다.
그들은 건축, 미술, 음악, 역사 등에 통달한 문화 여행의 전문 가이드였다. 괴테가 실천에 옮긴 그랜드 투어는 오늘날 여행산업의 원조였던 셈이다.
여행지는 이탈리아 혹은 스페인이지만, 정작 그랜드 투어를 산업 개념으로 접근한 이들은 영국, 독일, 네덜란드 등 산업화에 일찌감치 성공한 나라 기업가였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정작 돈은 다른 사람이 가져간 것이다.
요즘의 ‘서커스 주인’은 글로벌 온라인 여행 플랫폼(OTA)이다. 정보기술(IT)로 무장한 이들은 자기 나라로 들어오는 여행자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로 여행 가는 이들의 수요까지 싹쓸이하고 있다.
한국관광공사의 보고서에 따르면 세계 관광산업에서 온라인 유통채널이 차지하는 비중은 2021년 66%에서 2025년 72%로 확대될 전망이다. 부킹홀딩스(온라인 시장 점유율 36%, 2020년 말 기준), 익스피디아(28%), 에어비앤비(18%), 씨트립(15%) 글로벌 OTA그룹 네 곳이 온라인 채널의 97%를 과점하고 있다.
OTA의 공세 앞에 한국은 그야말로 속수무책이다. 한국으로 들어오는 ‘인바운드’ 관광객 중 거의 모두가 해외 OTA를 통해 상품을 구매한다. 해외로 나가는 ‘아웃바운드’ 시장에선 그나마 하나투어 등 토종 업체가 선전하고 있기는 하지만, 갈수록 OTA 공룡들의 장악력이 높아지는 추세다.
익스피디아, 트립닷컴 등 글로벌 OTA의 한국 지사장들이 틈만 나면 “한국 여행 시장은 아시아 최고”라며 엄지를 치켜세우고 있는 데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시쳇말로 ‘열심히 재주를 부리라’는 의미다.
한국의 여행산업은 유럽, 미국, 심지어 일본과 비교해도 역사가 짧다. 1989년에야 해외여행이 자유화됐다. 당시 여행사 ‘폭리’를 막기 위해 정책당국은 여행사 수수료를 9%로 제한했다.
여행업계 관계자는 “9% 상한선 때문에 웃지 못할 해프닝도 많았다”며 “10명 단체여행을 9% 수익률을 감안해 기획했다가 모객 인원이 20명으로 늘어나면 수익률이 상한선을 훨씬 넘곤 했는데, 이를 숨기는 게 여행사 재무팀의 주요 일과였다”고 말했다.
더 큰 문제는 여행을 산업 관점으로 바라보는 인식의 전환이 여전히 더디다는 점이다.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된 제주도 내 글로벌 호텔 체인은 단 한 곳(롯데드림타워 하얏트호텔·사진)뿐이다.
정부는 2023~2024년을 ‘한국방문의 해’로 선포했다. 로고도 새로 만들고, 한국방문의해위원장에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을 영입했다. 내용을 뜯어보면 ‘한국은 삼천리 금수강산’이란 말로 요약된다. 그 위에 ‘K컬처’가 양념으로 가미됐을 뿐, 늘 해오던 관행 그대로다. 저 멀리 글로벌 OTA들의 웃음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만 같다.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