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장의 절박한 이유가 있다. 미·중 충돌이 반도체를 넘어 제조업 전반에 악영향을 몰고올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는 점이 그렇다. 미·중 충돌 이전의 제조업에서 한국이 아니면 안 되는 고기술, 고부가가치 제조업으로 전략적 재편이 불가피해 보인다. 구조조정은 시간이 걸릴 것이고, 그 과정은 저성장의 고통이 될 것이다. 이때 성장과 일자리의 충격을 흡수하고 경제 구원투수 역할을 해줄 글로벌 경쟁력을 가진 서비스업의 존재는 생존의 과제가 된다.
최근 야놀자리서치 출범 세미나에서 장수청 원장은 “한국이 디지털 전환을 무기로 트래블 테크 기업과 관광산업의 글로벌화에 나서지 않으면 관광 식민지로 전락할지 모른다”고 경고했다. 부킹홀딩스, 에어비앤비, 익스피디아, 트립닷컴 등 이른바 글로벌 OTA(Online Travel Agency) ‘빅4’의 과점이 가속화하고 있다는 얘기다. 외국인의 국내외 관광은 말할 것도 없고, 내국인의 해외 관광에 이어 내국인의 국내 관광마저 위협받는 지경이다. 서비스업에 대한 차별과 산업 전략의 부재, 글로벌 스탠더드와 따로 노는 갈라파고스 규제 등의 필연적 결과란 게 장 원장의 진단이다.
관광만이 아니다. 한국의 서비스업 생산성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하위권에 속한다. 제조업 생산성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경제학자 윌리엄 보멀이 말한 대로 생산성은 낮은데 임금은 오르는 ‘비용 질병’과 ‘성장 정체’의 구조적 취약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급기야 서비스업의 낮은 생산성은 제조업은 물론이고 성장의 발목을 잡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서비스업이 이대로 가면 큰일 난다고 보는 더욱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1920년대 말 대공황을 배경으로 나온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으로 유명한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100년 후 미래 세대는 하루 3시간씩 주 5일 15시간 일한다는 에세이를 쓴 바 있다. 100년이 다 돼가는 지금 여전히 근로시간을 두고 줄다리기하는 현실이 케인스의 전망과 사뭇 다르다고 하겠지만, 누가 아는가. 챗GPT, GPT4.0 등 인공지능(AI)의 빠른 진화로 일하는 방식이 완전히 바뀌는 오피스 혁명이 생각보다 빨리 올지. 일과 여가의 파괴적 재구성이 일어나 케인스가 상상한 대로 주 15시간 노동시대가 온다고 상상해 보자.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엄청난 여가 시장이 어떤 비즈니스와 일자리를 만들어낼까.
여가를 잡는 쪽이 글로벌 승자가 될 것은 분명하다. 관광, 엔터테인먼트, 헬스케어 시장 확대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그뿐인가. 노동의 전환을 위한 교육 수요가 폭발하고, 소비 구조와 함께 금융에서도 일대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한국은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가. 발상의 전환을 하면 1인당 국민소득이 3만달러가 넘고 인구가 5000만 명에 달하는 국가에서 서비스업의 생산성이 낮다는 것은 그만큼 성장의 여지가 많다는 뜻이 된다. 반대로 그대로 두면 생산성이 높은 글로벌 외국 기업 차지가 되고 만다.
디지털 전환은 절호의 기회다. 디지털로 무장한 청년들이 우리의 자산이다. 미·중 간 경제 블록화가 무형의 서비스업까지 갈라놓을 수는 없다. 다양성과 실패의 자유로 곳곳에서 스타트업이 도전할 수 있는 환경이 되면 처음부터 글로벌 시장을 타깃으로 한 서비스업이 한국에서 나오지 말란 법도 없다. 서비스업의 글로벌화로 제조업과 서비스업 간 양방향의 혁신 순환이 형성되면 새로운 성장 신화가 쓰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인식 전환과 전략이 운명을 바꾼다. AI 시대 서비스업은 테크산업이자 신산업이다. K팝, K드라마 등 일부 성공 사례에 흥분해 분야마다 K를 붙이는 ‘국뽕’으로는 안 된다. 서비스업에 대한 일체의 차별과 규제를 없애고 제조업과의 경계를 완전히 허무는 국가 전략이 왜 한국에는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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