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로부터 독립한 1945년 8월, 한국에는 두 가지 과제가 생겼다. 하나는 정치·사회·문화 등 전방위적으로 남아 있는 일본의 잔재를 없애는 것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또 다른 강대국의 식민지가 되지 않도록 힘을 키우는 것이었다. 미술계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국 화단에 뿌리 깊은 ‘왜색’을 없애는 동시에 한국화만이 가질 수 있는 독창성을 기르는 게 당대 화가들의 과제였다.
박생광(1904~1985)과 박래현(1920~1976)은 이런 과제를 성공적으로 해냈다. 두 명 모두 일본으로 건너가 미술을 배웠지만, 그 속에서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발전시키며 ‘현대 한국화의 새로운 비전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들을 잘 모른다. 한국화에 대한 관심이 서양화의 인기에 가려져서다. 김환기 이우환 등 같은 시기에 서양화를 그린 거장들의 작품이 ‘억대’에 팔릴 때, 박생광과 박래현의 작품은 외면받은 이유다.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3층에서 열리고 있는 ‘한국화 대가 박생광·박래현 2인전-위대한 만남, 그대로·우향’은 잊혀져 가는 한국화 대가를 재조명하기 위해 마련한 전시다. 박생광 181점, 박래현 88점 등 총 269점의 작품이 출동했다. 전시를 기획한 김윤섭 아이프미술경영연구소 대표는 “박생광과 박래현 화백은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현대 한국화의 입지를 다진 주역들”이라며 “한국화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기 위해 이번 전시를 준비했다”고 말했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박래현의 작품이 먼저 보인다. 오랜 기간 ‘한국화의 거장’ 운보 김기창의 부인으로만 알려져 있었지만, 사실은 남편 못지않게 한국 미술에서 큰 발자취를 남겼다. 박래현의 작품엔 격동의 근현대사가 그대로 담겨 있다. 우선 초기 작품에선 일본화의 영향이 도드라진다. 제22회 조선미전에서 총독상을 받은 ‘단장’(1943)이 대표적이다. 검은 기모노를 입은 소녀가 붉은 거울 앞에서 머리를 매만지는 모습에선 일본화 특유의 얇은 선과 화사한 채색이 돋보인다.
이런 그림체는 해방 이후 점차 변하기 시작했다. 6·25전쟁 당시 피란지였던 군산의 여인들을 그린 ‘이른 아침’(1956)을 보면 알 수 있다. 일본에서 배운 화려하고 진한 채색은 온데간데없고, 차분하고 소박한 수묵 담채로 바뀌었다. 일본 ‘몽롱체(채색을 통해 흐릿하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표현한 일본 화풍)’ 대신 수탉을 안고 함지박을 머리에 이고 가는 여인, 등에 업혀 잠이 덜 깬 아이 등 피란민들의 일상을 사실적으로 나타내 ‘박래현만의 한국화’를 보여줬다. 전시장 말미에서 볼 수 있는 판화·태피스트리(직물공예) 등은 한국화의 지평을 확장하는 역할을 했다.
이번 전시에선 그동안 잘 볼 수 없던 박생광의 밑그림 스케치 100여 점도 볼 수 있다. 그의 작품을 세계 무대에 알린 1985년 파리 그랑팔레미술관의 ‘르 살롱-85’ 특별 초대전 포스터 등 박생광의 발자취를 따라갈 수 있는 자료들도 있다. 전시는 순서에 따라 박래현을 먼저, 박생광을 나중에 보는 것이 좋다. 색채가 강렬한 박생광을 먼저 보면 박래현의 작품이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전시는 오는 29일까지.
이선아 기자 sun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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