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넘었더니 이번엔 중국"…유럽의 에너지 첩첩산중[글로벌 핫이슈]

입력 2023-03-26 11:09   수정 2023-04-15 00:06


"지금 유럽은 해밀턴(미국 건국의 아버지들 중 한 명인 알렉산더 해밀턴을 지칭)의 순간을 맞이했다."

한 유럽의회 의원의 표현입니다. 해밀턴은 미국 초대 재무부 장관으로서 미국 금융·경제체계의 기틀을 마련하고 강력한 연방정부를 창설하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 인물입니다. 현재 미국 10달러짜리 지폐의 모델이기도 하죠. 지금의 유럽의 상황을 설명하는 데 난데없이 미국 건국의 아버지라뇨? 한국경제신문의 글로벌 핫이슈, 오늘은 유럽의 에너지 정책이 처한 첩첩산중의 형국을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러시아 의존도 줄였더니...이번엔 '中 천지'
이 의원이 '해밀턴 순간'을 언급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유럽이 지금 에너지 전환을 서두르는 과도기에 있기 때문인데요. 지난해 국제뉴스를 뜨겁게 달궜던 유럽의 에너지 대란 소식 기억하시나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에 말이죠. 유럽 국가들은 그동안 러시아산 원유와 천연가스를 값싸게 이용해 왔습니다.

하지만 이웃인 우크라이나를 침략한 러시아의 죄를 묻기 위해선 러시아산 에너지 자원에 대해 '손절'해야 했죠. 갑작스러운 변화에 에너지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았습니다. 독일이 그간 사들인 러시아산 천연가스만 해도 전체 에너지원 가운데 40%를 훌쩍 넘는 상황이었거든요. 러시아산 에너지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이들이 선택한 한 가지 방법은 '다변화'였습니다. 미국이나 카타르 등으로부터 액화천연가스(LNG) 같은 대체 자원의 수입을 늘리는 거죠.

또 다른 방안은 바로 '신재생에너지로의 전환'을 서두르자는 것입니다. 그동안 구호만 앞섰던 신재생에너지로의 전환에 진심이 된 것이죠. 덕분일까요? 최근 한 태양광 에너지 관련 연례모임에서 유럽의 태양광 업체 관계자들이 축포를 터뜨렸다고 합니다. 지난해 태양광 패널 설치 증가율이 폭등(2021년 대비 47% 증가)한 것을 기념하면서 말이죠.

하지만 동석했던 EU 당국자들의 마음은 불편했다고 하네요. EU 에너지 정책 담당 집행위원인 카드리 심슨은 말했습니다. "(러시아산) 화석연료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명분으로 또 다른 '과잉 의존도'가 정당화돼서는 안된다"고요. 바로 중국 때문입니다. 2021년 기준으로 EU로 수입된 태양광 패널의 4분의3 중국산이라고 합니다.

"이제는 이런 불안정한 상황을 바로잡아야 할 때"라는 게 EU 관계자들이 공유한 위기의식인가 봅니다. 특히 최근 미국 정부가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을 통해 자국의 전기차·신재생에너지 등 친환경 산업 생태계를 키우겠다고 공표했었죠? 여기에다 유럽에서도 최근 '중국 회의론'이 커지고 있습니다.
"역내 밸류체인 되살리려면 중국 도움 불가피"
과거 2012년부터 태양광 패널 등을 놓고 중국과 반복적으로 벌여왔던 반덤핑 관세 전쟁의 참담한 기억도 있구요. 그러니 당연히 '이참에 우리도 친환경 산업을 육성해 독립적이고 안정적인 공급망 기틀을 갖추자'는 목소리가 나올 수밖에요. 이를 "해밀턴의 시점"이라고 묘사한 EU 의원은 "우리도 언제까지 소비국 위치에 머무를 수는 없다"며 "유럽 제조국의 지위를 되찾아야 한다"고도 했습니다.

이달 중순 발표된 탄소중립산업법도 이같은 취지에서 마련됐죠. 2030년까지 태양광 발전을 포함한 탄소중립 기술의 역내 생산역량을 40%로 늘리기로요. 하지만 업계 관계자들의 현실 얘기를 들어보면, 목표치가 너무 비현실적이라 막막하기만 하다고 합니다. 현재 생산역량은 목표치의 절반에도 못 미치기 때문입니다.

2011년부터 중국 정부가 태양광 업계에 투자한 규모는 500억달러(약 65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됩니다. 유럽의 10배가 넘죠. 한 유럽 태양광 업계 관계자는 "이탈리아 전력 기업 에넬이 시칠리아에 3GW짜리 설비를 신설한다는 발표에 유럽인들이 좋아하고 있을 때, 중국에서는 20GW 규모를 떡 하니 내놓는 게 현실"이라고 토로합니다.

태양광 산업의 가치사슬은 폴리실리콘-잉곳-웨이퍼-셀-모듈로 이어집니다. 중국 업체들은 원재료 폴리실리콘을 비롯해 잉곳, 웨이퍼 부문까지 사실상 장악하고 있죠. 이 때문에 유럽의 업계 관계자들은 "유럽에서 태양광 가치사슬을 되살리고 탄소중립 목표치를 달성하려면 당분간이라도 중국 기업의 참여가 불가피하다"고 강조합니다. 유럽의 대중(對中) 활용법 딜레마는 이제 시작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김리안 기자 knr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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