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3월이면 프랑스 전역에서 ‘시인들의 봄(Printemps des Potes)’ 축제가 열린다. 벌써 25년째를 맞은 최대 규모 문학 행사다. 지난 11일부터 27일까지 펼쳐진 올해 축제의 주제는 ‘경계(frontires)’. 국경과 울타리를 넘어 시의 정신으로 온 세계를 아우르자는 의미다. 이번 축제에는 한국 시인들이 대거 참여해 더욱 눈길을 끌었다.
‘시인들의 봄’ 축제 기간이자 ‘세계 시의 날’(3월 21일)인 지난주 화요일 저녁, 파리 중심가에 있는 주프랑스 한국문화원에 양국 시인이 속속 모여들었다. 한국시인협회 방문단 20여 명과 프랑스시인협회 회원 40여 명 등 시인만 60명이 넘었고, 최재철 주프랑스 대사와 박상미 주유네스코 대사 등 국내외 인사 40여 명까지 동참했다.
다음날 파리시테대에선 ‘시인들의 봄’ 축제가 열리고 한국 시인 5명과 이 대학 재학생 6명이 시낭송 릴레이를 펼쳤다. 이규형 시인의 시 ‘대화’를 1학년생 이지스 폴레즈가 한국어로 낭송하고, 시인이 창작 배경을 설명하자 박수가 터졌다. 이런 방식으로 다른 시인들의 낭송과 설명이 이어졌다.
한국어 낭송과 함께 프랑스어 자막이 실시간으로 중계됐고, 창작 배경 설명은 동시통역으로 전달됐다. 이 대학 한국학과에 재학 중인 학생들은 한국어로 시를 쓰고 낭송했으며, 창작 의도도 한국어로 설명했다.
1학년인 루이 페냐르는 ‘숟가락인(人)’이라는 시에서 한국인 어머니와 프랑스인 아버지 사이에 태어난 자신의 정체성을 동서문화의 조합으로 절묘하게 표현해 감탄을 자아냈다. 그는 ‘숟가락과 젓가락, 나이프와 포크/ ‘수저’와 ‘나이포’/ ‘수저’는 동이고 ‘나이포’는 서입니다’로 시작하는 이 시에서 ‘저는 동과 서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저는 그 가운데에 있는 사람입니다./ 포크와 젓가락 사이에/ 저는 숟가락인이 아닙니까?’라며 한글과 한자까지 아우르는 묘미를 선보였다.
이날 문학평론가인 유성호 한양대 인문대학장은 “20세기 프랑스 문학이 한국에 큰 영향을 줬는데, 이제 한국 문학이 프랑스인의 가슴을 적시는 시대가 됐다”며 “양국이 문학적 영역을 함께 넓히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24일에는 프랑스 남부 엑스마르세유대에서 ‘한국 시의 날’ 행사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최동호 시인은 “방탄소년단(BTS)의 가사는 뛰어난 현대시의 표현”이라며 “디지털 문명이 시와 노래를 하나로 만들었으니 시는 반도체의 칩과 같다”고 말해 박수갈채를 받았다. 이 대학 한국학 전공 창설자이자 프랑스어판 한국문학 웹진 ‘글마당’ 창립자인 장클로드 드 크레센조는 “한국 시가 밀폐돼 있으면 안 되고 다른 나라 시와 즐거이 충돌해야 한다”며 “프랑스를 넘어 이탈리아와 한국 시의 만남을 추진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날 한국 시인 16명의 시낭송이 펼쳐지는 도중, 객석을 가득 메운 청중 가운데 눈물을 훔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한 학생은 “그동안 시에 관심이 전혀 없었는데 오늘부터 시를 사랑하게 됐다”며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기도 했다. 이를 지켜본 이근배 시인은 “프랑스와 한국은 ‘시의 나라’란 공통점을 지녔다”며 “세계적으로 시를 살리는 일에 두 나라 젊은이들이 협력해 달라”고 당부했다.
한국 시인들은 또 파리 6구에 있는 프랑스시인협회 사무실을 방문해 ‘매년 번역 시 교차 게재’ 등 실무 협약을 재확인하며 양국 협회의 첫 국제교류를 자축했다. 유자효 한국시인협회장은 “이번 행사가 성공하기까지 파리에 거주하는 조홍래 한국시협 국제 담당 자문위원 등의 도움이 아주 컸다”며 “앞으로 더 많은 교류 협력에 힘을 쏟겠다”고 말했다. 최재철 주프랑스 대사도 21일 협약 체결식 축사에 이어 23일 양국 시인을 대사관저로 초청해 만찬을 베풀며 한·프랑스 시의 영토를 넓히는 데 힘을 보탰다.
“BTS의 가사가 곧 시”라고 역설한 최동호 시인의 말마따나 현대 문명은 시와 노래를 하나로 엮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고 있다. 시는 인간의 모든 감정을 가장 짧고도 긴 울림으로 전달한다. 그래서 시를 매개로 하면 창의적인 산물이 나오고, 시를 상실하면 세상을 다 잃게 된다.
그렇지 않아도 대립과 폭력의 불협화음이 난무하는 시대다. 국경을 위협하는 전쟁과 이념 대립도 심화되고 있다. 이런 단절의 시대에 부드러운 시의 감성과 교감으로 ‘경계’의 안팎을 보듬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 치유와 화합의 명약이 곧 시다. 내년 프랑스의 ‘시인들의 봄’에 앞서 연내에 우리나라에서 가을시 축제가 탄생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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