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 때 놀더라도 지금 같은 환율 구조가 무엇을 담고 있는지는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일본 경제를 향해 ‘잃어버린 30년’이라는 표현을 많이 쓰지만 우리 경제도 피크아웃 경고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한 나라의 경제적 규모와 능력을 구성하는 인구, 투자, 생산성, 혁신, 신기술 등 모든 면에서 뒷걸음질을 치고 있다. 일본은 이미 이런 종류의 정체와 하강에 어느 정도 적응한 상태다. 국민들도 그다지 조바심을 내지 않고 있다. 부침이야 있어도 1인당 국민소득이 31년 연속 3만달러를 넘긴 나라다. 한국은 다르다. 2017년 3만달러를 넘어선 이후 거의 제자리걸음이다. 수출시장은 이미 피크를 친 느낌이다.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휘발유를 수출하는 총력전을 펼쳐왔지만 선진국들의 보호주의와 신흥국의 거센 견제·추격에 가로막혀 있다. 중국을 대체할 새로운 시장도 보이지 않는다. 수출다변화 구호는 물정 모르는 공무원들의 대책 자료로만 살아있다. 세계 지도를 펼쳐놓으면 더 이상 파먹을 곳이 없다. 지구촌 곳곳을 누비는 세계 5대 수출강국이 장차 불황에 대비해 아껴놓은 지역이 있겠는가 말이다. 지난해 국내투자 증가율은 -0.8%로 1998년(-20.5%) 외환위기 후 최악을 기록했다. 문재인 전 정부라고 나을 것이 없다. 집권 5년간 기업 설비투자 증가율은 연평균 1.1%로 역대 정권들 중 가장 저조했다.
더욱이 반도체 전기자동차 배터리 태양광 등 미래산업 신규 투자는 대부분 해외로 향하고 있다. 삼성전자가 자회사인 삼성디스플레이로부터 20조원을 차입한 것은 대단히 불길한 신호를 준다. 100조원 안팎의 현금을 들고 있는 기업이 돈이 없어 손을 벌렸을 리는 없다. 대규모 해외투자를 앞두고 해외법인들의 수익금을 국내 본사로 들여오기가 만만찮았기 때문이다. 선진국들의 자국우선주의와 지정학적 산업 재배치 전략으로 글로벌 경영의 낙수효과는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다. 아무리 싫어도 우리가 당면한 조건이다.
투자지표보다 더 한숨 나는 것은 투자환경이다. 사업환경 변화에 맞게 시간과 돈과 사람을 배분하는 가장 기초적인 경제활동조차 보장되지 않는다. 정치 과잉과 기업 규제는 차라리 부차적이다. 최근 불거진 근로시간 개편 논란은 두고두고 유감이다. 70년 묵은 주 단위 근로시간을 월 단위, 분기 단위, 연간 단위로 바꾸는 것이 핵심인데 ‘주 69시간 과로’라는 악의적 프레임만 남았다. 대통령실에서 고용노동부의 홍보와 소통능력 부재를 질타했다길래 3월 6일 발표한 보도자료를 다시 들여다봤다. 근로시간 선택권-근로자 건강권-휴가 활성화-유연한 근무로 이뤄진 목차 어디에도 과로를 조장하는 내용은 담겨 있지 않았다. 가난한 시급 노동자와 중소기업들이 혜택을 볼 정책인데도 오히려 보호가 차고 넘치는 대기업 정규직 근로자들이 들고일어났다. 이정식 장관은 피를 토하는 심정일 것이다. 이런 내용이 어떻게 노예노동계약으로 둔갑해 젊은 근로자들의 오해와 반발을 산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우리 사회의 합리성이 이 정도로 낮은 수준이라면 앞으로 연금개혁 교육개혁은 더 기대할 것도 없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면서도 매번 눈치를 보고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 사회는 정상적이지 않다. 모두 문제라고 지적하면서도 바로잡지 못하는 것들이 허다하다. 15년째 강제 동결된 대학등록금, 넘쳐나는 교육교부금, 경직적 최저임금제, 의료서비스 양극화, 국회 입법폭주, 서비스산업 부진, 혁신 플랫폼 막는 기득권 등은 우리 모두를 방관자요, 패배자로 만들어가고 있다. 국가적 개혁과제들이 조금의 진전도 이루지 못하고 좌초하면 어떻게 내부를 정비하고 힘을 모을 수 있겠나.
(내일자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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