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계열사인 현대엘리베이터에 1700억원의 배상을 하게 됐다. 대법원이 다국적 승강기업체이자 현대엘리베이터의 2대 주주인 쉰들러 그룹이 제기한 소송에서 쉰들러 그룹의 손을 들어주면서다.
대법원 3부(주심 노정희 대법관)는 30일 쉰들러가 현 회장과 한상호 전 현대엘리베이터 대표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현 회장이 현대엘리베이터에 1700억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한 전 대표는 배상액 가운데 190억원만큼의 책임을 현 회장과 공동으로 져야 한다.
재판부는 "현 회장 등은 계약 체결의 필요성이나 손실 위험성 등을 충분히 검토하지 않았거나, 이를 알고도 필요한 조치를 하지 않았다"며 "대표이사 또는 이사로서 현대엘리베이터에 대한 의무를 다했다고 볼 수 없다"고 판시했다.
사건은 2014년 쉰들러가 현 회장 등이 파생금융상품 계약으로 현대엘리베이터에 7000억원 가까운 손해를 입혔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됐다. 현대엘리베이터는 2006년부터 2013년까지 현대상선의 경영권을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복수의 파생금융상품에 가입했다.
현대엘리베이터와 계약 상대방 펀드들은 현대상선 주가가 오르면 이익을 나눠 갖는데, 주가가 내려가면 현대엘리베이터가 손해를 보는 구조였다. 현대엘리베이터가 당시 적대적 인수·합병(M&A) 시도 가능성이 있던 현대상선의 주식을 보유하면서 우호적으로 의결권을 행사한다는 내용도 계약에 담겼다. 현대엘리베이터는 자본금 확충을 위해 유상증자에 나선 현대증권 주식 관련 파생상품 계약도 체결했다.
이에 쉰들러 측은 2014년 현대엘리베이터 감사위원회에 공문을 보내 손해배상을 청구할 것을 요청했으나 감사위가 답변하지 않자 주주 대표 소송을 냈다. 쉰들러는 현대 측이 현대상선의 경영권을 방어하기 위해 현대상선 대주주인 현대엘리베이터에 파생금융상품 계약을 맺게 함으로써 거액의 손실을 끼쳤다고 주장했다.
반면 2심은 일부 파생상품 계약으로 현대엘리베이터에 손해가 발생했다며 현 회장이 청구금액의 일부인 1700억원을 배상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2심 재판부는 "현 회장은 계약 체결 여부를 결의하는 이사회에 참석하지 않았고, 현대엘리베이터 이사들이 현대엘리베이터에 막대한 손실을 가져올 수 있는 파생상품계약 체결을 의결하는 것을 막지 않는 등 감시의무를 게을리했다"고 밝혔다.
다만 해운업 불황이 길어지면서 주가가 계속 내려가리라 예측하기 어려웠던 점 등을 고려해 현 회장의 배상 책임을 1700억원으로 제한했다.
대법원도 2심 판단이 옳다고 봤다. 대법원은 "제3자가 계열회사 주식을 취득하게 하는 계약을 체결하는 경우 이사는 소속 회사의 입장에서 여러 사항을 검토하고 필요한 조치를 해야 한다"며 "계열회사 주가 변동에 따른 손실 가능성 등을 검토하고 파생상품 계약 규모나 내용을 적절하게 조정해 회사가 부담하는 비용이나 위험을 최소화하도록 조치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번 판결은 쉰들러가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투자자-국가 간 소송(ISD)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쉰들러는 2018년 8월 현대엘리베이터 유상증자로 3억달러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며 ISD를 제기했다. 2013~2015년 현대엘리베이터의 유상증자 등이 오너 일가의 경영권 강화 차원에서 이뤄졌는데도, 한국 금융당국이 이를 막지 않아 손해를 봤다는 것이다.
다만 일각에서는 "현 회장의 감시의무 미이행과 금융당국의 허가는 별개의 일이기 때문에 이번 대법원 판결이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오현아 기자 5hyu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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