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잠잠했던 예금자보호한도 상향 문제가 또 관심사가 됐다.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 사태가 계기다. 금융권은 물론 국회에서도 재빠른 논의가 뒤따라 주목된다. 여야 국회가 5000만원인 예금보호한도를 올려야 한다는 문제에선 모처럼 한목소리를 내는 게 이례적이다. 그만큼 절실해졌다는 얘기다. 하지만 예금자보호 제도를 바꾸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경영 상태나 자산운용 사정이 나쁜 금융회사가 건전성 관리보다 ‘고위험 돈장사’에 나설 가능성도 있고, 자산과 돈의 흐름에 급격한 쏠림이 나타날 수도 있다. 예금자들의 도덕적 해이도 가능하다. 하지만 경제 규모가 커졌고, 예금 자산도 늘어난 데다, 금융위기 가능성에 대비해 올려야 한다는 지적이 만만찮다. 최소 1억원으로 올리자는 예금보호한도 확대 주장, 타당한가.
해외의 주요국과 비교해도 너무 적다. 미국의 예금보호한도는 25만달러(약 3억3000만원), 일본 1000만엔(약 1억원), 유럽연합(EU)도 10만 유로(약 1억4000만원) 정도다. 1인당 GDP와 비교해도 한국은 1.3배에 그친다. 미국(3.33배) 일본(2.27배) 영국(2.26배) 독일(2.18배)보다 많이 떨어진다. 국제통화기금(IMF)이 권고하는 예금보호한도 기준(1인당 GDP의 1~2배)을 겨우 맞추는 수준이다.
더구나 우크라이나 전쟁과 함께 심화된 글로벌 공급망 이상으로 인플레이션이 심각하다. 그에 대한 해법 차원에서 고금리 기조가 이어진다. 신뢰를 바탕으로 안정 분위기에서 성장·발전하는 금융시장의 변동성이 커지면서 금융산업이 위기에 노출돼 있다. 미국 SVB 뱅크런 사태는 167년 역사의 스위스 두 번째 민간은행인 크레디트스위스(CS) 좌초로 이어졌다. 독일 최대 은행인 도이체방크까지 위기설에 휩싸였다. 스위스 은행에서 코코본드(조건부 전환사채)가 부실해지면서 독일 은행이 위기에 전염된 것이다. 안전 둑을 강화하는 등 사전 준비를 해야 할 상황이다. 최고의 안전대책으로 금융시장에 안정심리를 실어주려면 예금보호한도를 높여야 한다. 더구나 지금은 ‘휴대폰(디지털) 뱅크런’으로 예금 인출이 순식간에 일어나는 시대다. SVB 사태를 보면 이런 ‘소리 없는 예금 인출’은 밤도 없다. 뱅크런 조짐이 나타나기 전에 예방이 중요하다.
금융회사의 ‘도덕적 해이’를 부추길 가능성도 있다. 보호한도를 높이면 경영이 부실하고 자산운용 능력이 떨어지는 소규모 금융회사로도 예금이 늘어날 수 있다. 이런 금융사들은 위험을 무릅쓰면서 자산을 운용하게 된다. 예금자보호 제도가 고위험의 무리한 ‘돈장사’를 부추기는 결과를 낳는 것이다. 예금자도 금융회사 사정과 역량이야 어떻든 금리만 좇아갈 수 있다. 보험 제도의 맹점을 이용하는 전형적인 도덕적 해이다. 나아가 금융권역별 자산 이동과 금융기관 간 쏠림 같은 현상도 예상할 수 있다. 가뜩이나 고금리인데 예금보호한도가 올라가면 주식·채권에 투자된 자금이 일반 저축예금이나 은행으로 급격하게 쏠릴 수 있고 그에 따른 부작용이 만만찮아진다.
금융업종별로 수신(예금받기) 경쟁이 과열되면 그 여파로 예금 금리가 오르면서 대출 금리까지 함께 오르는 부작용도 생긴다. 그러지 않아도 가계대출이 사상 최대 수준이다. 대출 이자 부담 증가는 불경기에 심각한 독이 된다. 2022년 하반기 국내 자금시장이 경색되자 은행채 발행이 어려워진 은행이 막힌 자금 유치를 위해 예금 금리를 올렸고, 이로 인해 대출 금리까지 덩달아 올라 비상이 걸린 적이 있다.
허원순 한국경제신문 수석논설위원 huhw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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