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필하모닉, 런던심포니 같은 세계 정상급 악단들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진은숙의 작품을 연주하고 사이먼 래틀, 켄트 나가노 등 지휘 명장들이 아낌없는 신뢰를 보낸다. 그런 그가 오랜만에 한국 무대를 찾았다. 지난해부터 예술감독을 맡은 통영국제음악제의 막을 올리기 위해서다.
음악제 개막을 하루 앞둔 지난 30일 경남 통영시 도남동 통영국제음악당에서 진은숙을 만났다. 지난해 바로크, 고전, 낭만, 현대에 이르는 공연 프로그램과 세계적인 연주자들의 명연으로 호평을 끌어낸 그는 “자화자찬으로 들릴 수 있겠지만, 올해 음악제는 더 대단하다. 한 마디로 대박”이라며 양손 엄지를 세워 보였다.
“코로나19 팬데믹 영향에서 벗어나면서 계획한 대로 출연진과 공연 레퍼토리가 이뤄졌어요. 완성도가 남다르죠. 제가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조합과 음악, 제가 듣고 싶은 소리를 구현하기 위해 공을 들였습니다.” 올해 음악제의 주제는 ‘경계를 넘어’다. 진은숙은 “다채로운 음악으로 고정관념이나 틀에 박힌 사고를 무너뜨리겠다는 의미를 담았다”며 “다양한 인종과 다양한 시대의 음악, 다양한 편성의 음악에 눈뜰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음악제 프로그램에는 그의 두 번째 바이올린협주곡 ‘정적의 파편’ 아시아 초연 무대도 담겼다. 이 작품 영감의 원천인 그리스 명바이올리니스트 레오니다스 카바코스가 무대에 오른다. “악기별로 하나의 협주곡만 쓰겠다는 원칙을 깨고 쓴 작품이에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경이로운 카바코스의 연주는 힘든 시기 저를 버티게 한 힘이었습니다. 그와 함께 작업하는 일은 마치 제 인생에 놓인 선물 같아요.”
통영국제음악제를 스위스 루체른페스티벌 같은 아시아 대표 음악제로 성장시키겠다는 그의 결심은 1년 새 더욱 단단해져 있었다. 진은숙은 “통영국제음악제처럼 공연 프로그램을 처음부터 전부 구상하고 연주자를 일일이 초청하는 식의 음악제는 국제적으로도 찾기 쉽지 않다. 특정 연주단체를 불러 그들이 원하는 곡으로 레퍼토리를 구성하는 경우가 대다수”라며 “주도성을 갖춘 통영국제음악제만의 저력이 향후 거대한 영향력을 갖추는 기반이 될 것”이라고 했다.
예술감독 일을 하면서도 진은숙은 새로운 관현악곡과 물리학자 볼프강 파울리의 이야기를 담은 신작 오페라를 작곡 중이다. 세계적인 작곡가 반열에 올랐다는 평가를 받지만 여전히 그는 작곡할 때 깊은 좌절감에 휩싸인다고 했다. “지금껏 발표한 작품 중 희열을 느낄 만큼 좋았던 곡은 없습니다. 작곡할 때 스스로가 하찮은 벌레처럼 느껴지는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죠. 브람스 같은 위대한 음악가의 작품을 들을 때면 ‘저 정도는 써야 작곡가 행세를 하는 거지’란 생각도 합니다. 제게 작곡은 언제나 어려운 일이에요.”
창작의 고통에도 계속 작곡가의 길을 걸을 수 있게 하는 동력은 무엇일까. “만족할 수 없기에 계속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다음엔 더 잘해보자’라는 생각 때문에요. 진로를 바꾸기엔 너무 늦어버리기도 했고요. 하하.”
김수현 기자 ksoohyu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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