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NG 운반선 수주 '싹쓸이'…부활의 뱃고동 울린 K조선

입력 2023-04-03 16:26   수정 2023-04-03 16:27

지난달 22일 찾은 HD현대중공업 울산 조선소 1안벽(부두). 초대형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이 새파란 바닷물을 등지고 위용을 떨쳤다. 뱃머리에서부터 선체 맨 뒷부분까지의 길이는 299m로, 63빌딩(약 250m) 높이를 넘는다. 갑판에 오르려면 계단이나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아파트 14층 높이(35.5m)를 ‘등반’해야 한다. 총 4개의 화물창(LNG 저장 공간)을 갖춘 이 배는 한 번에 17만4000㎥ 규모의 LNG를 운반할 수 있다. 한국인 전체가 하루 동안 소비하는 LNG의 절반과 맞먹는 양이다.


안벽은 최종 마무리 작업이 이뤄지는 공간이다. 이 선박도 87%가량 건조 작업이 완료돼 전기·통신 장비 설치, 선실 내부 공간 배치 등 마무리 공사만 남겨두고 있었다. 안벽으로 옮겨지기 전 블록 조립 작업은 도크(물웅덩이 형태의 선박 건조 시설)에서 이뤄진다. 울산 조선소 내 10개 도크는 40~50개의 선박으로 꽉 찬 모습이었다. 많게는 1200t 규모의 대형 블록을 한 번에 실어나를 수 있는 ‘트랜스포터’가 조선소 곳곳을 분주히 오갔다. 아파트 36층 높이(109m)의 ‘골리앗크레인’ 8대도 프로펠러 등 선박 부품들을 바삐 날랐다.

이날 울산 조선소에서 느껴진 활기는 10년에 가까운 불황을 딛고 일어선 한국 조선업의 부활을 알리기에 충분했다. HD현대중공업이 대외에 조선소 내부 모습을 공개한 것도 2015년 이후 8년 만이다. 한영석 HD현대중공업 부회장은 “수주도 많이 이뤄졌고, 일감도 찼다”며 “스마트조선소 등 개선된 여건을 기반으로 HD현대 그룹은 앞으로 날아오를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까지 HD현대중공업의 수주 잔량은 155척으로, 4년치에 가까운 일감을 확보한 상태다. 현대미포조선·현대삼호중공업을 포함한 조선 부문 3사의 작년 한 해 수주 실적은 239억9000만달러(197척)였는데, 이는 목표치(174억4000만달러)를 38% 웃돈다.
○LNG 운반선 시장 ‘독주’

한국 조선사들은 특히 LNG 운반선 시장에서 독보적인 경쟁력을 나타내고 있다. 이 시장의 주도권은 LNG 운반선의 꽃이라고 불리는 ‘화물창(LNG 저장 탱크)’ 기술에 의해 결정된다. 1990년대 초까지는 모스(MOSS)형 화물창을 앞세운 일본 조선사들이 독무대를 펼쳤다. 그러다 선체와 화물창을 일체화해 적재 용량을 약 40% 늘린 멤브레인 기술이 등장하면서 판도가 바뀌었다. HD현대중공업은 이 기술을 개발한 프랑스 엔지니어링 회사 GTT(Gaz Transport & Technigaz)와 1979년 기술 협약을 체결하며 시장을 선점했다. 이후 대우조선해양, 삼성중공업까지 나서 멤브레인형 화물창 제작에 필요한 주변 기술 개발에 속도가 붙었다. 그 결과, 1990년대 후반부터 국내 조선 3사는 LNG 운반선 시장의 리더로 떠올랐다.


지난해 초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LNG 수요가 폭증한 것을 계기로 LNG 운반선 시장은 본격적인 활황세로 진입했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2022년 전 세계에서 발주된 LNG 운반선은 1452만CGT(표준화물선환산톤수)로, 전년 대비 131% 늘었다. 같은 기간 발주량이 각각 42%, 52%, 57% 쪼그라든 컨테이너선, 탱커, 벌커 시장과 대조된다. 한국 조선업계는 전체 발주량의 70%(1012만CGT)를 싹쓸이하며 LNG 운반선 제작 기술 강국으로서의 입지를 공고히 했다.

HD현대중공업은 멤브레인형 기술에 기반해 ‘하이멕스(HiMEX)’라는 독자 화물창을 개발하고, 운항 도중 자연 기화되는 가스를 잡아채 연료로 다시 활용하는 이중연료추진시스템을 개발하는 등 LNG 선박 관련 기술에서의 ‘초격차’ 달성에 힘을 쏟았다. 2017년부터 매년 LNG 운반선 수주량 1위를 놓치지 않고 있는 비결이다. 현재 수주 잔량 중에서도 3분의 1 이상인 34%가 LNG 운반선으로 채워져 있다. 지난달 29일 오세아니아 소재 선사로부터 발주받은 LNG 운반선 2척의 가격은 척당 2억5950만달러(약 3381억원)로, 사상 최고가를 경신했다. 대우조선해양이 그리스 최대 해운사인 안젤리쿠시스그룹 산하 마란가스로부터 척당 2억5625만달러의 LNG 운반선을 수주한 지 불과 2주 만에 재차 새 기록을 쓴 것이다.

HD현대 관계자는 “고부가가치 선박 위주의 선별 수주 전략이 성과를 내고 있는 셈”이라고 했다.
○대체연료 선박 시장에서도 ‘선두’

글로벌 조선업계의 최대 화두는 ‘탈탄소’다. 국제해사기구(IMO)가 올해부터 탄소 배출 규제 수준을 강화하는 등 선박 시장에서 대대적인 변화가 감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선박의 심장’이라고도 불리는 엔진 관련 기술은 친환경 선박 건조에서 핵심 경쟁력으로 꼽힌다. HD현대는 메탄올과 디젤을 선택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이중연료(DF) 엔진을 개발해 세계 2위 선사인 머스크, 국내 최대 선사인 HMM 등이 발주한 선박에 납품해왔다. 엔진기계사업부의 HD현대중공업 내 매출 비중은 20%가량에 달한다. 자체 사업부를 두고 수직계열화를 이룬 덕분에 수주에서도 덕을 봤다. 이 회사의 메탄올 추진선 누적 수주량은 총 54척으로, 세계 최다 실적이다. 한주석 HD현대중공업 엔진기계사업대표는 “글로벌 선박 시장이 탈탄소 시대로 가는 변곡점에 놓인 가운데, 끊임없는 기술 혁신을 통해 세상에 없는 제품을 개발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메탄올뿐 아니라 암모니아, 수소 등 대체 연료 시장에서 우위를 점하겠다는 게 HD현대 그룹의 비전이다. 2021년 암모니아 연료공급시스템을 개발, 개념설계에 대한 기본인증(AIP)을 획득했고 최근에는 디젤과 LNG·수소 혼합 연료를 선택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혼소(混燒)엔진’ 성능 검증도 마쳤다. 모두 업계 최초 시도였다. 연구개발(R&D) 역량도 꾸준히 강화하고 있다. HD현대 조선 부문 지주사인 HD한국조선해양은 R&D 투자 비용을 2020년 852억원에서 2021년 925억원, 2022년 1252억원으로 늘렸다.

친환경 선박 수요는 IMO가 탄소중립 시한으로 설정한 2050년까지 빠른 속도로 증가할 전망이다. 영국의 조선·해운 시황 분석기관 클락슨리서치에 따르면 대체 연료 추진 선박 발주량은 지난해 32척에서 2030년 64척, 2050년 100척까지 늘어날 것으로 예측됐다. 메탄올 추진선의 경우 작년 한 해 발주량이 29척인데, 올 들어 1~2월 두 달 만에 24척이 발주됐다.

이에 따라 지난해 3분기 국내 조선 ‘빅3’ 중 가장 먼저 흑자 전환에 성공한 HD한국조선해양의 실적 개선 기대도 더해지고 있다. 증권업계에선 이 회사가 올해 9172억원, 내년에는 1조8322억원의 영업이익을 낼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인력 확보에도 적극적이다. HD현대중공업과 현대미포조선은 올 연말까지 각각 1500여 명, 700여 명의 외국인 근로자를 채용할 계획이다. 외국인 인력 수급과 정착 지원을 전담하는 ‘동반성장인력지원부’도 신설했다. 가삼현 HD한국조선해양 부회장은 “친환경 연료 개발 및 고도화에 역량을 집중해 해양 모빌리티 시장을 선도하겠다”고 말했다.

장서우 기자 suwu@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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