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재들이나 마시던 술이었는데…'쌀 한톨'이 판 뒤집었다 [정영효의 인사이드 재팬]

입력 2023-04-05 07:11   수정 2023-04-05 08:10


알콜쌀 한톨 한톨을 40% 이상 깎아서 만든 사케를 긴조吟?酒라고 한다. 50% 이상 깎아서 만든 사케는 다이긴조大吟?酒가 된다. 쌀을 많이 깎을 수록 맛과 향이 좋아지기 때문에 고급 사케로 분류한다. 쌀을 40%에서 50%로 10% 더 깎는데는 두 배의 시간과 전기료 그리고 쌀이 사용된다.



대신 다이긴조는 긴조보다 세 배 가량 비싸게 팔린다. 지금 히로시마에서는 '혼조조本?造, 긴조, 다이긴조'로 이어지는 사케 등급 체계를 완전히 바꿀지도 모르는 혁명이 일어나고 있다. 긴조용 쌀로 다이긴조를 능가하는 맛과 향의 술을 만들 수 있게 돼서다. 위스키에 비유하자면 18년산 원액으로 30년산을 능가하는 위스키를 만들 수 있게 된 셈이다.

버블(거품)경제 시기 사케는 맛 없고 '아재'들이나 마시는 술 취급을 받으며 오랜 침체기를 겪었다. 사케가 부활한 건 2000년대 들어서다. 여성들도 즐겨 마시는 세련된 술로 이미지 변신에 성공한 덕분이었다. 이미지를 변신시킨 원동력이 사케의 고급화다.



다이긴조, 긴조 등 등급을 강화하고, 지역마다 독특한 개성을 가진 '지사케(地酒)'가 만들어지면서 사케는 프랑스 와인처럼 문화와 얘깃거리가 있는 주종이 됐다. 지금은 사케 애호가들 사이에서 '준마이 다이긴조, 준마이 긴조, 혼조조'와 같은 사케 등급은 상식으로 통한다.



하지만 사케 등급화가 생겨난 건 쇼와시대(1926~1989년) 후기 들어서부터였다. 사케 등급화를 가능하게 만든 곳이 히로시마다. 쌀을 40~50% 이상 깎을 수 있는 정미 기술이 이 지역에서 처음 개발됐기 때문이다.



한 세기 전만 하더라도 히로시마는 사케 불모지였다. 사케 양조를 위해서는 적합한 물과 정미 기술이 필요하다. 히로시마에는 둘 다 없었다. 큰 강이 없어서 정미용 수차를 설치하지 못했고, 수질이 연수(軟水)인 히로시마는 술 빚기에 실격이었다. 쌀을 발효시켜 만드는 사케에는 미생물이 풍부한 경수(硬水)가 필요했다.



히로시마 사람들은 자연환경의 한계를 기술력으로 뛰어 넘었다. 150여년 전 연수로 사케를 빚는 연수양조법軟水?造法과 수차 대신 자체 동력으로 움직이는 동력정미기를 차례로 개발했다. 수차 대신 동력으로 움직이는 정미기의 개발은 사케의 판도를 바꿔 놨다.

수차로는 10% 밖에 깎지 못하던 쌀을 동력정미기로는 50~60%까지 깎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다이긴조 긴조와 같은 사케의 등급이 히로시마에서 태어났다고 평가하는 이유다.



일본에서 처음으로 동력 정미기를 개발해 사케 고급화의 문을 연 회사가 1896년 히로시마현에서 문을 연 '사타케サタケ'다. 흔해빠진 토속주에 불과했던 일본 사케가 와인과 같이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주류로 지위가 상승한 건 사타케 덕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히로시마 지역의 정미기 회사였던 사타케는 오늘날 일본을 넘어 세계 최대 곡물 가공기계 업체로 성장했다. 사타케의 정미기는 북미 시장의 98%, 아시아 시장의 70%, 중동·아프리카 지역의 60%를 점유하고 있다. 일본 대형 정미공장 시장 점유율도 70%로 압도적인 1위다.

쌀에 그치지 않고, 세계 3대 곡물인 밀, 옥수수 등 다양한 곡물의 가공기기로 사업을 확대한 덕분이다. 사타케의 정미기는 150개국에 수출된다. 그룹 전체 종업원은 3000명에 달한다. 사타케는 어떻게 세계 최대 곡물 가공기기 업체로 성장했을까. 사케 등급 체계를 완전히 바꿀 혁명은 어떻게 일어났을까.

히로시마=정영효 특파원 hug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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