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부가 이날 공개한 30년 경과 비밀해제 외교문서 2361권(약 36만 쪽 분량)에는 1991~1992년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협상 과정과 첫 북·미 고위급 회담 등에 대한 내용이 담겼다. 이때 북한은 소련 해체로 국제정세가 급변하자 외교적 고립을 우려해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채택하고,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핵 임시 사찰 요구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북한 측은 주한미군기지 사찰을 우선 요구하며 한국이 제시한 남북한 동시 시범 사찰을 거부했다. 주한미군은 6·25전쟁 정전 직후부터 북한의 침략에 대비해 핵포탄과 핵순항미사일 등 전술핵무기를 배치하고 있었다. 이후 우발적 핵전쟁 우려 때문에 1970년대부터 전술핵 규모를 줄였고, 1991년엔 한국 내 핵무기를 완전히 철수했다. 그러나 북한은 해당 내용을 파악하지 못해 이후에도 주한미군에 대한 핵사찰 필요성을 주장했다.
김영남 당시 북한 외무상은 유엔총회 연설차 뉴욕을 방문하면서 “IAEA 사찰을 통해 우리 핵 의혹은 해소되고 있는 반면 상호 사찰이 이뤄지지 않아 남한 내 미군기지에 대한 핵 의혹이 상존한다”고 주장했다.
1992년 한·중 수교와 맞물린 한·대만 단교의 막후 상황에 대한 내용도 눈에 띈다. 당시 중국 고위 관료를 만난 뒤 귀국한 후카다 하지메 일본 사회당 의원은 유병우 주일한국대사관 참사관에게 “(중국) 공산당 간부들은 공식 석상에서는 한·중 수교에 대해 발언을 자제하고 태연한 척했지만, 식사와 주연 석상에서는 한국과 대만의 단교에 크게 기뻐하고 ‘한국이 대단한 정치적 결단을 해줬다. 이로써 한국에 큰 빚을 지게 됐다’고 했다”고 전했다.
한국이 1990년 한·러 수교에 이어 한·중 수교까지 체결하자 북한의 내부 충격은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1992년 9월 18일 주홍콩 한국총영사가 주홍콩 일본영사로부터 들은 내용을 보고한 문서에 따르면 당시 김정일은 장시간의 내부 연설을 통해 “일부 공산주의 국가가 돈 때문에 공산주의 원칙마저 포기하고 있다”며 중국을 맹렬히 비난했다.
맹진규 기자 mae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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