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광 기자
예전에 815 콜라라고 있었어요. 겉면에 '콜라 독립' 딱 박혀있고. 뭔가 비장하죠. 콜라 하나 먹는데. 코카콜라, 펩시콜라 말고, 한국 것 먹자. 애국 마케팅의 끝판왕이었지. 맛은, 뭐 그냥 그랬어요. 이때가 IMF 구제금융 직후였는데. 국가, 나라, 민족 이런 것을 굉장히 강조할 때였어요. 외제차 타면 나쁜놈 되고. 심지어 담배도 말보로 피면 욕먹었어요. KT&G가 이때 내놓은 담배가 뭔지 아세요? 시나브로. 지금 보면 촌스럽지만, 순우리말로 지은 거죠.
근데, 요즘 중국이 이렇다고 해요. 중국말로 '궈차오'라고 하던데. 우리말로는 애국주의.
중국 자동차 판매 순위 보니까 대부분이 중국차. 홍광, 비야디, 리상, 번번, 아이온. 이 중에 아는 것 있어요? 세계 자동차 순위는 도요타, 폭스바겐, 현대차 순인데. 하나도 안 보이죠.
차만 그런 게 아니라 아웃도어, 게임, 영화, 유·아동 등등. 소비재 많은 분야에서 중국 기업의 약진이 두드러집니다. 안타까운 것은 한때 중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K뷰티, 한국 화장품 매출 또한 뚝 떨어졌는데요. 그 자리를 위노나, 프로야, 화시즈 같은 중국 브랜드가 채우고 있어요.
특히 K뷰티의 선봉에 섰던 아모레퍼시픽의 실적 감소가 두드러지는데요. 중국에서 지난해 적자를 내기도 했습니다. 이번 주제는 중국과 헤어질 결심하는 아모레퍼시픽입니다.
아모레퍼시픽의 전신이 태평양이었죠. 서성환 회장이 창업주예요. 현재 총수인 서경배 회장의 아버지죠.사실 서성환 회장의 어머니가 창업주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윤독정여사란 분인데. 개성에 '창성상점'이란 가게를 세우고 동백기름을 팔았고, 이 사업을 아들 서성환 회장이 도운 게 시작이었습니다.
동백기름은 옛날에 머리에 발라서 윤기가 흐르게 하는 역할을 했죠. 이 동백기름이 나중에 태평양의 대표 상품이 된 abc포마드가 됩니다.
옛날 태평양 시절 로고 보면 ABC가 있는데. abc포마드에서 유래된 겁니다.
태평양은 이런 헤어용품을 발전시켜 다양한 화장품에 이르는데. 화장품도 잘 만들었지만. 한국 유통 산업을 송두리째 바꿀 만한 판매 방식을 도입해서 폭발적으로 성장합니다. 바로 방문판매였어요.
이건 세계 다른 나라에는 잘 없는 한국 만의 독특한 판매 방식인데요. 태평양이 방문판매를 도입했던 게 1964년이에요. 당시에는 여성의 사회참여 비율이 상당히 낮았는데. 여성분들이 애 보고 집안일 해야 해서 밖에 잘 못 나갔잖아요. 그런데 방문 판매원이란 사람이 집에 왔다고 생각해 보세요. 처음에는 경계하겠죠. 근데 화장품 샘플을 막 공짜로 줘. 화장품도 발라줘. 그럼 미안해서라도 하나 사주잖아요.
그런데 화장품만 파는 게 아니야. 동네 소식도 전해주고. 어디 집에 갔더니 누가 곗돈 들고 날랐더라. 누구네 집 아들이 취업했더라. 방문 판매원분이 동네에 오면 아줌마들이 막 몰려들어. 샘플 얼굴에 바르면서 그 얘기 듣는 거죠. 심지어 이분들이 일수도 꽤 했다고 하더라고요.
홍보, 마케팅, 판매, 배송, 금융, AS 전부 다 한 거죠. 원스톱으로.
이 방문판매가 얼마나 잘 됐는지. 당시 태평양의 화장품 매출의 대부분이 방문판매에서 나왔다고 해요. 방문판매를 위해 전용 브랜드도 만들었는데. 이게 바로 '아모레' 입니다. 아모레에 회사 이름 태평양을 영어 단어 퍼시픽을 붙인 게 지금의 아모레퍼시픽이죠.
태평양의 방문 판매원이 한때 4만명에 이를 정도로 많았어요. 야쿠르트 아줌마와 쌍벽을 이뤘죠.
아모레퍼시픽이 방문판매에 이어 또 한번 폭발적으로 성장하게 된 계기는 중국이었어요.
1990년대에 일찌감치 중국에 가긴 했는데, 이땐 그렇게 크게 성공은 못 했어요. 본격적으로 매출이 증가한 것은 2000년대 들어서입니다. 국민소득이 빠르게 늘었거든요. 중국인들이 먹고살 만해지니까 화장품을 엄청나게 사기 시작해요. 2000년 중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2000달러를 넘었고 2004년 3000달러, 2010년 5000달러, 2019년 1만달러를 차례로 돌파했어요.
아모레퍼시픽은 2002년 라네즈, 2005년 마몽드, 2011년 설화수, 2012년 이니스프리, 2013년 에뛰드를 차례로 중국에 선보였습니다. 아모레퍼시픽이 중국에서 통한 이유. 바로 가성비인데요.
유럽, 일본의 고가 브랜드에 비해 우선 싸고. 근데 성분은 나쁘지 않고. 중국 사람들이 성분 굉장히 중시하는데. 아모레퍼시픽은 화학 성분 잘 안 쓰고. 홍삼, 열매 이런 거 많이 쓰고. 또 디자인이 좋았어요. 용기 디자인이. 유럽, 일본에 꿀리지 않아.
여기에 한류까지 가세했는데. 2013년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가 중국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어요. 거의 신드롬에 가까웠어요. 이 드라마 이후 한국 화장품 판매가 급증해요.
이게 아모레퍼시픽의 연도별 매출인데요. 별그대 이후에 확 느는 게 보이죠. 2014년 4조원, 2015년은 5조원을 차례로 넘겼어요. 중국 시장의 성장이 절대적으로 컸습니다. 주가도 이때가 전성기였어요.
한때 450만원을 넘기기도 했어요. 이후에 10대 1 액면분할을 했기 때문에 지금 기준으로 하면 45만원쯤 하는 것이죠.
전성기가 이때였다는 것은, 지금은 아니란 것이죠. 주가만 봐도 알 수 있는데요. 현재 주가가 13만원 선인데, 고점 대비로는 3분의 1토막이고. 10년 전인 2014년 수준과 비슷합니다.
무슨 일이 있었냐. 있었죠. 아주 큰 일이 있었어요.
시작은 한한령이었습니다. 중국 정부가 자기들 TV에서 한국 드라마, 음악, 예능을 하나하나 빼더니 이걸 자동차, 유통, 화장품 같은 산업으로 확대해요. 미국 사드 미사일을 한국에 배치했다는 게 맘에 안 들었던 것이었죠. 바로 '사드 보복'이었어요. 당시에는 이러다 말겠지 했거든요. 그런데 지나고 보니 그게 아니었어요. 한국 기업들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습니다. 롯데가 슈퍼, 마트 몇백개를 한꺼번에 정리하고 나가고. 이마트도 매장 다 팔고. 현대자동차는 사드 보복 이전인 2016년 연간으로 중국에서 180만대 가까이 팔았는데요. 지금은 30, 40만대쯤 팝니다.
화장품은 그래도 다른 산업에 비해 잘 버텼는데. 중국 사람들이 한국 화장품을 못 사게 되니까 다른 경로로 샀거든요. 바로 면세점인데요. 한국이 면세점은 세계 최고잖아요. 특히 화장품 구색이 워낙 많고, 또 가격이 싸니까. 보따리상 '따이궁'이 몰려와서 화장품을 싹 다 쓸어가서 중국에 재판매를 했거든요. 따이궁 파워로 꽤 살아갑니다.
그런데, 사드 보복이 조금 풀리나 하니까. 이번에는 코로나 팬데믹이 온 거죠. 이건 사드와 다르게 진짜 컸어요. 산업이 완전히 박살이 났거든요. 밖에 못 나가니까 화장할 일이 없고. 또 나간다 해도 마스크를 쓰고 있으니 화장품을 아무래도 덜 쓸 수밖에 없게 된 겁니다. 중국은 다른 나라들과 달리 올 초부터 봉쇄를 풀어 타격이 더했어요.
그런데 여기에 하나가 더 있어요. 미국이 중국을 때리기 시작해요. 중국이 너무 커지니까 대놓고 견제하기 시작한 것인데요. 트럼프 행정부 때는 트럼프가 좀 독특해서 그러나 했는데, 바이든 행정부가 들어선 뒤에는 더 노골적으로 중국을 압박하죠. 특히 대만 문제에 미국이 개입한 게 컸던 것 같아요. 대만은 중국에 역린, 건드리면 안 되는 그런 것인데. 미국이 이걸 건드리니까. 중국 정부뿐 아니라 국민들의 거부감이 엄청났던 것 같아요.
궈차오, 애국주의가 거세진 것도 이런 배경 있었던 것 같아요. 특히 한국은 미국 편에 조금 더 서다 보니 중국 사람들의 반한 감정이 더 커졌는데요. 이게 화장품 산업에서도 극명하게 나타난 것이죠.
아모레퍼시픽의 경우 중국 내 화장품 매출이 급감해서 2015년을 정점으로 계속 줄고 있는데요. 지난해 매출이 4조원을 조금 넘겼는데, 이건 2014년 이후 가장 적은 것이었어요. 영업이익률도 5% 수준에 불과했어요. 잘 될 때는 15%를 넘겼거든요. 지금은 화장품이 잘 팔리지도 않지만, 그나마도 팔려면 마진을 줄여서 1+1이나 거의 정품 수준의 샘플을 줘야 소비자들이 사는 겁니다. 특히 중국에선 지난해 역마진이 날 정도로 마진도 없이 팔았어요.
중국에서 잘 안된 것은 이런 대외 여건도 있지만, 한국 화장품 회사들 책임도 있는 것 같아요. 애국주의가 강했다면 화장품도 다 중국 것만 써야 할 텐데. 꼭 그렇지는 않았었거든요. 랑콤, 로레알, 디올, 샤넬 같은 프랑스 화장품과 시세이도, SK-2 같은 일본 화장품 브랜드는 잘 팔렸습니다. 특히 일본 화장품은 2019년부터 계속 수입 화장품 1위를 하고 있고. 프랑스 화장품도 일본 화장품 못지않게 잘 나갑니다. 일본, 프랑스 화장품은 프리미엄, 혹은 럭셔리 화장품에 속하는데요. 중국에서도 소비가 양극화되는 경향이 있는데. 고가 화장품은 수입품을 아직까지 대체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반면, 한국 화장품 브랜드가 속해 있는 중가 부분에선 중국 화장품이 상당 부분 대체했어요.
이 말은 앞으로 중국 사람들이 화장품을 더 많이 소비하고, 한국에 단체로 여행을 많이 와도 예전만큼 한국 화장품을 쓸어 담지는 않을 것이란 얘깁니다. 중국이 코로나 봉쇄를 작년 말부터 풀기 시작하니까 증시에서 아모레퍼시픽 주가가 반짝 올랐는데, 이건 너무 과거 생각만 한 것이죠. 오히려 공매도가 늘어나는 것을 보면 주가 하락에 베팅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아모레퍼시픽의 공매도 잔고 비중은 4% 안팎에 이르는데요. 전체 주식의 4%인 235만주, 3000억원어치에 이릅니다. 공매도는 주가가 내릴 것에 베팅해서 미리 판 뒤에 주가가 내려가면 싸게 사서 갚는 매매기법이에요.
중국이 회복하길 10년 가까이 기다렸지만, 예전과 다르다는 생각을 회사도 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너무 늦게 판단한 감도 있죠. 이동순 아모레퍼시픽 대표가 얼마 전 주주총회에서 "중국 의존도가 너무 높았던 게 아킬레스건이었다"고 밝히기도 했어요. 중국, 너 이제 보내줄게. 뭐 이런 느낌이죠.
실제로 중국 매장을 급격히 줄이고 있어요. 적자가 나니까 어쩔 수 없는 것인데요. 중국에서 한때 가장 인기를 끌었던 이니스프리 매장은 작년 말 기준 67곳까지 줄었습니다. 한때는 600개가 넘었어요. 올해 안에 전부 정리할 것으로 보입니다. 또 마몽드 매장은 작년 1분기에 400곳이었는데, 지금은 한 곳도 없습니다. 그나마 고가 라인인 설화수 매장은 유지하고 있는데. 중국 화장품 시장에서 그나마 럭셔리 라인은 좀 되니까. 설화수 강화를 더 하려는 것 같습니다.
아모레퍼시픽은 중국 이외 대안도 찾고 있는데요. 그 대안이 놀랍게도 미국입니다.
미국은 말할 것도 없이 세계 최대 시장이죠. 중국 인구가 아무리 많다고 해도 미국을 이길 순 없습니다. 씀씀이가 다르거든요. 미국의 화장품 시장은 연간 890억달러. 110조원이 넘습니다. 중국은 미국 시장의 65%인 580억달러 정도 합니다.
시장은 큰 건 알겠는데, 진짜 통할까. 미국이 화장품을 수입하는 국가 순서를 봤더니. 2021년 기준 한국이 3위에 올랐습니다. 1위는 너무나 당연히 프랑스이고, 2위는 캐나다입니다.
물론, 미국 화장품 시장에서 수입 제품이 차지하는 비중은 약 34%로 내수 비중이 훨씬 큽니다. 또 한국 기업이 강점을 가진 기초 화장품보다는 색조 화장품을 훨씬 많이 사서. 소비 패턴도 차이가 있어요. 하지만 마스크팩이나 쿠션 팩트 같은 K뷰티만의 독특함과 기발함을 발휘한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전문가들은 보는 것 같아요.
아모레퍼시픽은 북미 시장 공략을 위해 타타하퍼란 브랜드를 인수했는데요. 이 회사는 합성 화학물질이 일절 없는 100% 자연 유래 성분으로 화장품을 만든다고 해요. 아모레퍼시픽이 기초에 강한데, 미국 내에서 자신의 강점을 잘 활용하려는 것 같습니다.
아모레퍼시픽은 최근 설화수 글로벌 앰베서더로 미국에서 인지도가 높은 블랙핑크의 로제를 선정했는데요. 미국 시장 공략에 올인하고 있다는 의미 같습니다.
설화수는 최근 화장품 용기도 완전히 바꿨는데. 그동안 써 왔던 한문 표기를 없애고 완전히 영문으로만 넣었어요. 디자인도 중국보다는 미국을 타깃으로 한 게 느껴집니다. 중국 사람들은 이런 거 좋아하죠.
아모레퍼시픽이 의도한 대로 북미 시장에서 성과를 낸다면 진정한 글로벌 뷰티 기업이 될 텐데요. 그동안 중국 위주, 면세점 위주에서 벗어나 보다 큰 세계로 나가 성과가 나면 좋겠습니다. 여기에 중국에서 의외로 또 잘 된다면. 과거와 같은 큰 성장세를 다시 보일 수도 있을 겁니다.
진행 안재광 기자
편집 이지현 PD
촬영 박지혜·박정호 PD
디자인 이지영·박하영
제작 한국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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