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0월 이후 6개월 동안 "인위적인 감산은 안 하겠다"는 입장을 지켜왔던 삼성전자가 지난 7일 "공급성이 확보된 제품 중심으로 의미 있는 수준까지 메모리 생산량을 하향 조정 중"이라고 발표했다. 반도체 원판인 웨이퍼 투입량을 줄여 생산량을 적극적으로 줄이는 '인위적 감산'을 시행 중이란 사실을 공개한 것이다.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 대다수 임직원이 이날 아침까지 인지하지 못했을 정도로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삼성전자가 인위적 감산을 시행한 건 1998년 외환위기 때 이후 약 25년 만이다. 지금까지 삼성전자는 생산 라인을 최적화하거나, 연구개발(R&D)용 웨이퍼를 투입하는 식으로 생산량을 조절하는 '기술적 감산'을 시행해왔다.
인위적 감산을 하면 시장에 반도체 공급량이 줄어든다. 반도체 생산업체나 스마트폰 기업 등 고객사들은 쌓아 놓은 재고를 활용하게 된다. 재고가 소진되면 새로운 주문이 나오고, 반도체 가격이 오르게 된다. D램 시장의 45%, 낸드플래시의 34%를 점유하고 있는 삼성전자의 인위적 감산 선언은 반도체 업황 회복의 '트리거' 역할을 할 가능성이 크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삼성전자에선 "인위적 감산을 하지 않고 버텨야 한다"는 쪽이 우세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최근 고위 경영진들에게 "단기적인 실적에 흔들리지 말고 중장기 성장동력을 확보하는 데 주력하라"고 주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주에도 삼성전자 반도체사업을 담당하는 DS(디바이스솔루션)부문 관계자들은 "SK하이닉스, 마이크론 등 경쟁사들이 지난해 9~10월 인위적인 감산을 시작했고 6개월이 지났다. 시장에 공급량이 줄어드는 '감산 효과'가 이제 본격화될 것이다. 지금 와서 인위적 감산을 할 이유가 없어 보인다"고 말했다. 왜 삼성전자는 갑자기 인위적 감산을 결정했을까.
가격은 하락 추세다. D램 고정거래가격은 지난해 초 3.41달러에서 올 3월 1.81달러로 하락했다. 낸드플래시 고정거래가격도 2022년 5월 4.81달러에서 지난달 3.93달러로 내려왔다. 올해 2분기 전망도 긍정적이지 않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2분기 D램 평균 판매단가(ASP)는 전 분기 대비 10~15% 하락할 전망이다.
재고는 쌓이는데 가격이 내려가면 '재고 평가손실'이 불어나게 된다. 현대차증권은 작년 4분기 DS부문 재고 중 메모리반도체 재고를 15조원대로 가정했을 때 1분기 재고자산 평가손실은 '2조원대 중반을 넘을 것'이라고 추산했다.
트렌드포스의 전망대로 2분기 가격이 추가 하락하면 삼성전자의 재고자산 평가손실은 더 커지게 된다. 2분기 DS부문 영업이익이 4조원대 손실로 추정되는 1분기보다 나아지지 않을 것이란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삼성전자가 '업황 반등 시그널'을 찾지 못했을 가능성도 크다. 삼성전자 DS부문 고위관계자들은 "메모리반도체 수요는 한 번 살아나게 되면 정말 빠르게 회복된다"고 말해왔다. 가격 반등 신호가 보이면 고객사들이 좀 더 싼 값에 사기 위해 매수 주문을 쏟아내고, 그러면 가격이 더 빠르게 오른다는 것이다. 성장기의 수혜를 온전히 흡수하기 위해선 감산하지 않고 생산능력을 유지하는 게 유리하다.
업황 반등의 키 포인트는 코로나19 봉쇄가 풀린(리오프닝) 중국 경제의 회복이 꼽혔다. 중국은 반도체 수출의 40%를 차지하는 핵심 시장이다. 스마트폰 PC 수요가 살아나면 삼성전자에 대한 메모리반도체 주문도 증가한다.
중국 경기에 온기가 돌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기대처럼 강력한 회복세는 보이지 않고 있다. 글로벌 투자은행(IB) 씨티는 지난 3일 "중국 경기 회복이 예상보다 오래 걸릴 것"이라고 전망했다.
경기 지표에서도 회복세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3월 차이신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제조업 구매관리자지수(PMI)는 50을 기록했다. 전월 51.6, 시장 컨센서스인 51.4를 밑도는 수치다. PMI가 50을 밑돌면 경기 위축, 50을 웃돌면 경기가 확장 국면을 뜻한다. 가까스로 50을 유지했지만 '여전히 중국 경기가 약하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중국 시장이 살아나지 않으면 삼성전자도 버틸 수만은 없다. 삼성전자 DS부문은 매년 50조원 가까운 자금을 시설투자와 연구개발(R&D) 등에 쓰고 있다. 올 1분기에 삼성디스플레이로부터 투자재원 확보를 위해 '20조원'을 빌려 놓을 정도다. 이런 상황에서 1분기 4조원대 영업적자에 2분기에도 비슷한 규모의 적자를 기록하게 되면 재무적인 부담이 커지게 된다. 3분기, 4분기에도 적자 가능성이 있다.
"기존 공급 정책을 1~2개 분기만 더 유지하였어도 산업 내 인수합병이 발생할 수 있었지만, ‘분기 적자’를 넘어서 ‘’연간 적자’를 기록할 수도 있다는 공포가 더 크게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다."(김선우 메리츠증권 반도체 담당 연구원)
이런 분위기 속에서 갑자기 '인위적인 감산'으로 선회한 데는 외부의 압박도 작용했을 것으로 분석된다. 시장에선 "삼성전자의 주요 주주들이 '인위적 감산 시행과 공표'를 압박했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작년 말 기준 삼성전자 지분 5% 이상을 보유한 외부 주주는 국민연금공단(7.53%)과 글로벌 자산운용사 블랙록(5.03%)이다.
주주들 입장에선 삼성전자 기업 가치가 커질수록 좋다. 삼성전자 주가가 1년간 5~6만원대 '박스권'에 갇힌 가장 큰 이유는 메모리반도체 업황 부진이다. 시장에선 "삼성전자가 인위적인 감산에 나서야 업황이 살아나고 주가가 오를 것"이라는 주장이 꾸준히 나왔다.
정부 입장에서도 삼성전자의 '무감산' 정책은 부담 요인으로 작용했을 수 있다. 올해 들어 경상수지는 11년 만에 2개월 연속 적자를 기록했다. 2월 반도체 수출이 지난해 2월보다 41.5%나 감소한 게 컸다. 이 결과 상품수지가 13억달러 적자를 기록했고, 경상수지 악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줬다.
삼성전자의 '무감산' 정책에 SK하이닉스가 직격탄을 맞는 것도 부담 요인으로 거론된다. SK하이닉스는 삼성전자 입장에서는 경쟁자로 '이겨야 할' 대상이지만, 국가적인 차원에선 한국의 반도체산업을 지탱하는 주요 플레이어 중 하나다. 가뜩이나 지금은 반도체가 전략물자로 자리매김했고 국가 간 '반도체 전쟁' 양상의 패권 다툼이 벌어지는 상황이다. SK하이닉스의 경쟁력이 약화하는 건 한국 산업에 부담 요인이 될 수밖에 없다.
SK하이닉스 경영진들도 간접적으로 삼성전자를 향해 '감산 동참'을 요청했다. 지난달 29일 박정호 SK하이닉스 부회장은 기자들과 만나 "D램 시장은 과점으로 공급업체가 3개 밖에 없다. 엄청난 공급을 한다고 생각하면 (고객들이) 가격을 계속 내린다. 고객은 3명(기업)을 가지고 플레이하고 있다. 계속 게임을 하면 다운사이클에서 공급이 초과해 가격이 내려가는 속도가 엄청나게 빠른 과정을 겪는다"고 말했다. 반도체업계에선 "SK하이닉스가 간접적으로 삼성전자에 감산 동참을 요청한 것"이란 평가가 나왔다.
이같은 분석에 대해 정부는 선을 그었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삼성과 감산에 대한 논의는 없었고 미래를 제일 잘 아는 당사자는 기업들"이라며 "감산에 대해서 알거나 아는바도 없고 대화해서 조율할 부분도 아니다"고 설명했다. 이어 "정부가 책임질 것도 아니고 전적으로 삼성전자에서 판단한 거 아닌 가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인위적 감산'이란 주사위는 던져졌다. 삼성전자의 결정이 삼성전자의 감산 결정으로 메모리반도체 업황의 반등 시점은 기존 상황보다 앞당겨질 가능성이 크다. 업계에선 이르면 '올해 3분기' 늦으면 내년 상반기가 될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삼성전자 입장에서 중요한 건 업황 회복기의 과실을 가져갈 수 있는지다. 좋은 제품을 고객이 원하는 만큼 적시에 공급할 수 있는 게 중요하다. 결국 기술력, 생산능력이 핵심 포인트다.
생산능력에 대해선 자타공인 삼성전자가 최고로 꼽힌다. 기술력에 대해선 최근 의문부호가 붙고 있다. 불과 3년 전만 해도 D램과 낸드플래시의 기술 경쟁력에 대해 삼성전자가 1~2년 앞서있었다는 평가가 나왔다. 지금은 다른 얘기가 있다. DDR5 등 최신 규격 D램이나 HBM 등 차세대 D램 제품에 대해선 SK하이닉스가, 낸드플래시와 관련해선 SK하이닉스뿐만 아니라 마이크론까지 삼성전자를 추격하는 수준을 넘어 '추월했다'는 분석이다.
이를 의식해서인지 삼성전자는 '인위적 감산' 발표에도 불구하고 '중장기 투자를 차질 없이 이어갈 것'이란 의지를 나타냈다. 삼성전자는 "단기 생산 계획은 하향 조정했으나 중장기적으로 견조한 수요가 전망되는바, 필수 클린룸 확보를 위한 인프라 투자는 지속하고 기술 리더십 강화를 위한 R&D 투자 비중도 확대해 나갈 예정"이라고 강조했다.
황정수 기자 hj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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