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일 서울 대현동 이화여대 대강당. 클래식 전용 콘서트홀도 아닌 평범한 대학 강당에 뉴욕필하모닉 음악감독이자 차기 서울시립교향악단 음악감독인 ‘명장’ 얍 판 츠베덴(63)이 지휘봉을 들고 올라섰다. 자신의 제안으로 이뤄진 서울시향의 ‘아주 특별한 콘서트’를 이끌기 위해서다.
거장이 이끄는 한국 최고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단돈 1만원에 들을 수 있다는 소식에 이날 2800여 개 좌석은 오래전 동났다. 대학생뿐 아니라 엄마 손을 꼭 붙잡은 어린아이부터 머리 희끗한 노부부까지 다양한 연령대가 같은 무대를 바라봤다. 관객석 곳곳에는 이번 공연에 초청받은 발달장애인 친구들이 눈에 띄었다.
오후 7시30분, 무대에 오른 츠베덴은 청중에게 간단한 인사를 건넨 뒤 빠르게 손을 들어 올렸다. 첫 작품은 베토벤의 ‘에그몬트’ 서곡. 괴테가 쓴 같은 이름의 희곡을 읽고 베토벤이 작곡한 극부수음악 중 일부다. 츠베덴은 명성에 걸맞게 현악기의 깊은 음색과 목관악기의 신비로운 선율, 금관악기의 웅장한 울림을 조화롭게 이끌었다. 그러자 베토벤 특유의 장엄한 서정성이 살아났다.
곧이어 자폐 스펙트럼 장애가 있는 바이올리니스트 공민배(19·화성나래학교)가 등장했다. ‘바이올린계의 우영우’로 불리는 공민배는 청중의 박수에 90도 인사로 화답하더니, 츠베덴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 1악장을 시작하겠다는 신호였다. 그는 섬세한 보잉(활 긋기)과 정확한 고음 처리로 멘델스존 특유의 부드러우면서도 우아한 매력을 잘 표현했다. 쉴 새 없이 활을 긋는 구간에서 강조할 음을 명쾌하게 짚어내는 능력과 악상을 분명하게 표현하는 역량은 여느 솔리스트 못지않았다.
공민배를 돋보이게 한 것은 츠베덴의 능숙한 지휘와 서울시향의 유연한 움직임이었다. 츠베덴은 연신 고개를 돌려가며 공민배의 바이올린에 서울시향의 소리를 예민하게 맞춰갔다. 때로는 장대한 울림으로, 때로는 유려한 선율로 대강당을 부족함 없이 채웠다.
“브라보” 청중석에서 환호가 쏟아지자 츠베덴은 굳어 있던 공민배를 따뜻하게 안아주며 등을 여러 번 토닥였다. 이 모습이 “(공민배와 같은 장애가 있는 자신의 아들을 떠올리며) 아버지의 마음으로 지휘했다”는 츠베덴의 인터뷰와 겹쳐졌다. 공민배를 바라보는 츠베덴의 눈빛에서 대견함, 애틋함, 사랑스러움이 읽혔다.
이어진 작품은 레스피기의 4악장 교향시 ‘로마의 소나무’. 츠베덴은 빠르게 쏟아내는 선율의 진행을 세밀하게 조율해가며 레스피기 특유의 신비로운 음색과 화려한 분위기를 살려냈다. 금관악기의 거대한 울림과 목관악기의 날카로운 아티큘레이션(각 음을 분명하게 연주하는 기법), 현악기의 섬세함, 하프와 피아노의 단단한 터치가 만들어낸 입체감은 우레와 같은 박수를 이끌기에 충분했다.
마지막 곡은 하나의 리듬이 169회 반복되는 라벨의 대표작 ‘볼레로’. 츠베덴은 스네어 드럼 연주를 시작으로 차례로 등장하는 악기군의 명도와 악상을 정교하게 다듬으면서 역동적인 작품의 매력을 드러냈다.
이날 공연은 분명 1만원짜리가 아니었다. 연주 실력이나 프로그램 구성 면에서 수십만원짜리 공연에 뒤지지 않았다. 클래식 전용 콘서트홀이 아닌 게 아쉬울 뿐이었다.
“음악은 영혼의 음식이다. 사회적 약자들에게도 영혼의 풍요가 닿아야 한다.” 츠베덴이 지난 1월 기자간담회에서 남긴 말이다. 그런 무대였다.
김수현 기자 ksoohyu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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