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반도체 산업이 위기다. 지난달 국내 반도체 수출액은 1년 전보다 34.5% 급감했다. 메모리 반도체가 주력인 삼성전자의 올 1분기 영업이익은 전년보다 95.8% 쪼그라들었다. 이런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최근 실낱같은 희망이 담긴 소식이 전해졌다. 인공지능(AI) 반도체 스타트업 리벨리온이 세계 최고 권위의 AI 반도체 성능 테스트 대회인 엠엘퍼프(MLPerf)에서 이 분야의 절대 강자인 미국 엔비디아와 퀄컴을 앞섰다
리벨리온의 AI 반도체 ‘아톰’은 동급의 퀄컴과 엔비디아 제품보다 이미지를 분석하는 비전 분야의 처리 속도에서 최고 3.4배 빠른 것으로 나타났다. 해당 분야에서 지금까지 나온 제품군 가운데 역대 최고 성능을 기록했다. AI 반도체가 포함된 시스템 반도체 분야는 한국 반도체 산업이 경쟁력을 반드시 끌어올려야 하는 분야로 꼽힌다.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시스템 반도체의 비중은 50%가 넘지만 한국 기업의 점유율은 3% 정도에 불과하다.
AI 반도체는 시스템 반도체 분야에서 중앙처리장치(CPU)와 그래픽처리장치(GPU)처럼 두루 쓰이는 반도체와 달리 특정 분야 연산에 특화된 반도체다. 올 2월에 나온 아톰은 데이터센터용 AI 반도체다. 최근 주목받은 ‘챗GPT’ 등 생성형 AI 서비스를 제대로 구동하기 위해서는 뒷단의 데이터센터에서 관련 연산을 재빨리 해야 한다. 아톰은 이런 곳에 쓰일 제품이다.
엠엘퍼프에 따르면 아톰은 언어모델 분야에서도 동급의 퀄컴과 엔비디아 제품보다 1.4~2배 이상 성능이 앞섰다. 리벨리온을 사용하는 AI 챗봇이 가장 빠른 대답을 제공한다는 얘기다. 박 대표는 “에너지 효율은 언어 모델 기준으로 기존의 최고 제품보다 3~4배 정도 뛰어나 데이터 전력 소모량을 3분의 1 이상 줄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런 속도전이 리벨리온의 성장 비결이라고 박 대표는 설명했다. 그는 “직원들이 자신이 만든 회사의 성과를 빨리 확인하면서 회사의 성장을 자신의 성장으로 여기는 강도가 강해졌고 업무 몰입도는 높아졌다”고 말했다. 업무에서 직원의 오너십을 무엇보다 우선하는 리벨리온에는 인사평가, 연차제한, 법인카드 한도 등이 없다. 리벨리온의 경영진은 엠엘퍼프 성과를 발표한 날에도 이런 조직 문화를 유지·강화하기 위해 다음 날 오전 3시까지 회의를 했다.
조직 문화를 강조하는 것은 핵심 경쟁력이 인력이기 때문이다. 설립 초기부터 ‘국가대표급’ 반도체 개발자가 모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박 대표는 인텔, 스페이스X를 거쳐 모건스탠리에서 퀀트(계량 분석) 개발자로 근무했다. 오진욱 최고기술책임자(CTO)는 IBM 왓슨연구소에서 AI 반도체 수석설계자로 근무했다. 김효은 최고제품책임자(CPO)는 의료 AI 기업 루닛에서 딥러닝 기술 개발을 진두지휘했다.
세계 최대 팹리스 ARM, 애플,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의 박사급 베테랑 개발자도 리벨리온으로 속속 모였다. 상용 제품이 나오지도 않았지만 ‘사람’만 보고 싱가포르 국부펀드인 테마섹 파빌리온캐피털, KT, 산업은행, 카카오벤처스, 미래에셋벤처투자, KB인베스트먼트 등이 1000억원 이상을 리벨리온에 투자했다.
박 대표는 이제 시작이라고 강조했다. 그동안 제품 개발에만 집중한 리벨리온은 내년 1분기에 처음으로 상용 제품을 출시할 계획이다. 창업 4년만에 첫 매출을 기대할 수 있게 됐다는 얘기다. 그는 “리벨리온의 반도체 성능이 아무리 뛰어나도 엔비디아와 퀄컴 반도체 사용에 익숙한 고객사의 검증을 받고 신뢰를 얻어야 제품을 팔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시장 분위기는 나쁘지 않다. 구글, 마이크로소프트(MS) 등 잠재 고객사들이 먼저 연락을 해왔다. 박 대표는 상반기에 이들 기업의 실무자를 만날 예정이다. 올해 안에 KT의 데이터센터에 아톰을 도입해 실제 사용 사례도 만들 계획이다. 박 대표는 “10년 후에는 퀄컴을 인수할 수 있을 만큼 회사를 키울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주완/이시은 기자 kjwa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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