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정의에 도전하는 책이다. 아코디언처럼 모든 페이지가 하나로 이어진 책 <녹스>를 국내 출간했던 출판사 ‘봄날의 책’이 이번에는 22개 소책자로 쪼개진 <플로트>를 냈다. 두 책의 저자는 캐나다 고전학자이자 시인 앤 카슨이다.
<플로트>는 ‘떠다닌다(float)’는 뜻의 제목대로 행선지가 정해져 있지 않다. 22개의 소책자가 접착되지 않은 채 PVC 케이스 안에 목차, 옮긴이의 말 등과 담겨 있다. 각 소책자에는 카슨의 시와 산문, 비평, 희곡, 논문, 강연록, 축사, 전시 안내문 등이 적혀 있다.
하나의 소책자가 각기 책이고, 또 전체가 한 권의 책이 되는 셈이다. 표지 색깔도 저마다 다르다. 물결을 연상시키는 쪽빛, 에메랄드색 등이다.
한국어판 책도 원서의 형태를 그대로 본땄다. 본문뿐 아니라 외형에도 저자의 집필 의도가 녹아들어 있기 때문이다. 카슨은 목차 아래 “순서에 구애받지 마시고, 자유롭게 읽어주세요”라고 적었다.
누가 읽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책이 된다. 22개의 소책자를 조합하는 방법은 산술적으로 11해2400경727조7776억768만 가지에 달한다.
처음 케이스에 들어가 있던 순서(제목 가나다 순)대로 읽어도 되고, 일부만 골라 읽거나 표지 색깔대로 묶어 읽을 수도 있다. 어떻게든 상관 없다. 박지홍 봄날의책 대표는 “목차가 무의미해 독자들을 당황시키는 고약한 책이면서, 책을 읽어낼 수 있는 방법이 거의 무한대인,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책”이라고 설명했다.
독자가 있어야 완성되는 책이다. 신해경 번역가는 “읽기라는 행위에 좀 더 적극적으로 개입함으로써, 우리는 이 책을 저만의 독특한 꽃다발로 만들 수 있다”고 썼다.
카슨은 왜 이런 책을 고안했는지 속 시원히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소책자 ‘108’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카슨은 한 남자가 들려준 이야기를 요점만 메모했다가 불완전하게 기억했던 경험을 적었다.
그는 “나는 그를 진정으로 알지 못했다”며 “그때 나는 ‘부유(floatage)’라는 단어를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고백한다. 누군가를 완벽하게 이해하기란 불가능하지만 그 오해에서 문학이 시작된다고 말하는 듯하다. 이것 역시 <플로트>를 읽는 여러 방법 중 하나일 뿐이다.
구은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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