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아가 노동조합에 장기근속한 직원의 자녀를 우선 채용하는 ‘고용세습’ 단체협약 조항을 즉시 철폐하자고 공식 요청한 것으로 확인됐다. 윤석열 정부가 고용세습 단체협약을 아직 개정하지 않은 기아 노사에 대한 사법처리 절차에 착수하자 움직임에 나선 것이다.
기아와 기아 대표이사는 노조가 단체협약 개정에 합의해주지 않을 경우 노조 측과 함께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다.
18일 노동계에 따르면 기아는 대표이사 명의로 민주노총 금속노조 기아 지부장에게 ‘우선채용 관련 단체협약 제27조 제1항 개정 협조 요청’이란 제목의 공문을 지난 17일 보냈다.
해당 조항은 ‘재직 중 질병으로 사망한 조합원의 직계가족 1인, 정년 퇴직자 및 장기근속자(25년 이상) 자녀를 우선 채용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앞서 고용노동부는 산재 사망자의 직계 자녀를 제외한 정년 퇴직자나 장기근속자의 자녀를 우선 채용하는 것은 위법한 단체협약이라고 판단, 100인 이상 사업장 1057곳의 단체협약을 전수조사해 위법한 우선·특별채용 조항이 확인된 60곳에 대해 작년 8월부터 시정조치에 나섰다.
기아와 비슷한 시기에 고용부로부터 시정명령을 받은 LG유플러스와 현대위아 등 13곳이 노사 협의를 거쳐 단체협약을 개정하는 등 현재까지 54곳이 개선을 완료했다.
하지만 고용세습 조항이 있는 사업장 중 가장 규모가 큰 기아는 작년 말 지방노동위원회의 시정명령 의결로 석 달여간 시정 기한이 주어졌지만 아직 단체협약을 개정하지 않았다. 기아 노조는 “사측과 교섭을 통해 단체협약을 개정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니 기다려달라”며 협의에 소극적인 입장이다.
이에 고용노동부 안양지청은 기아 노동조합이 소속된 산별노조인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금속노조와 금속노조 위원장, 기아와 기아 대표 등을 시정명령 불이행에 따른 노동조합법 위반 혐의로 최근 입건했다.
기아 측은 공문에서 “회사는 해당 조항의 개정 관련해 여러 차례 걸쳐 귀 노조(기아차 노조)에 법 위반 조항을 개정해 달라고 요구했음에도 현재까지 개정에 이르지 못했다”며 “형사 사건으로 입건돼 수사가 진행 중이며 형사처벌이 예견되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이어 “언론사에서 당사를 고용세습 및 불공정 채용 사례 기업으로 지적하며 우선채용 조항 유지 및 노동부 시정명령을 이행하지 않은 사실에 대해 연일 비판하고 있다”며 “고객과 국민의 부정적 시선이 노사 모두에게 부담될 수 있으므로, 즉시 단체협약 제27조 제1항(세습 조항)이 개정될 수 있도록 적극적인 협조를 요청한다”고 당부했다.
윤석열 대통령도 전날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미래 세대의 기회를 박탈하는 고용세습을 반드시 뿌리 뽑아야 한다”며 고용세습 조항 철폐에 힘을 실었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기회의 평등을 무너뜨려 공정한 기회를 원천 차단하는 ‘세습 기득권’과 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며 “일명 ‘현대판 음서제’인 고용세습을 뿌리 뽑을 것을 고용부와 관계 기관에 지시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반면 노조 측은 사측과 올해 교섭에서 고용세습 조항 개정을 논의하기 어렵다며 사실상 '버티기'에 들어갔다. 기아 노사의 단체협약은 2년에 한 번 갱신하는데, 올해엔 임금협상만 진행하고 단협 갱신은 내년에 하겠다는 설명이다.
금속노조는 같은날 성명에서 “금속노조 방침에 따라 각 사업장은 단체협약 논의 테이블이 열리면 절차에 착수할 것”이라며 “재벌 귀족의 경영 세습부터 철폐하라”고 주장했다.
노동계에서는 “기아 사측이 노조에 정식으로 고용세습 조항의 즉시 철폐를 요구한 만큼 노조도 더 이상 ‘사측과 교섭을 통해 개정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는 기존 주장을 되풀이하기 어려울 것”이란 반응이 나왔다.
한편 단체협약 시정명령에 응하지 않아도 처벌 수위가 최대 벌금 500만원에 불과해 거대 노조의 변화를 이끌어 내기 힘들다는 비판이 나온다. 노조 관계자도 "현재로서는 단체협약 개정에 응할 가능성이 작다"고 덧붙였다.
이에 정부는 연내 마련할 공정채용법(채용절차법 개정안)에 고용세습을 채용 비리와 같은 불공정 채용 행위로 규정하고, 미이행 시 처벌 수위를 징역형으로 높이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오형주/곽용희/김일규 기자 ohj@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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