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학대 출신으로 의대에 진학했지만 동료들의 텃새는 예상보다 심했다. 당시 그는 ‘왕따’를 이겨내는 방법은 실력 뿐이라고 생각했다. 독서실에서 밤을 새며 상위 5% 성적으로 졸업했다. 이후엔 모교인 연세대 대신 서울아산병원 인턴을 택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이방인이었다. 좋은 성적으로 인턴 생활을 마친 뒤 다시 세브란스병원 내과 레지던트에 지원했지만 20명 정원 안에 그의 자리는 없었다. 최종 불합격 통보를 받았다.
기회가 다시 열린 것은 당시 합격자 중 한 명이 지병으로 레지던트 생활을 포기하면서다. 대기 1번이었던 그는 세브란스병원 내과 전공의로 추가 합격했다. 다시 ‘이방인의 벽’을 절감한 그는 스스로를 더욱 채찍질했다. 병원에 궂은 일이 생길 때마다 자원해 업무를 맡았다. 당직 근무를 대신 서느라 첫 아이 출산조차 보지 못했다. 당시 그의 즐거움은 시간을 내 논문을 쓰는 것이었다. 이런 노력은 ‘연구우수 전공의상’으로 결실을 맺었다. 조 센터장은 “논문을 쓰다가 책상에서 자주 잠들었다”며 “40대까지 편히 잔 적이 없다”고 했다.
종양내과 의사가 된 그는 전임의 1년차 때 항암제 ‘이레사’에 내성이 있는 환자들을 위한 연구를 했다. ‘이레사’ 내성 환자에게 다른 표적항암제인 ‘타세바’를 처방했더니 EGFR 양성 돌연변이 환자에게서 암세포가 급격히 감소했다는 것을 밝혀냈다. 이 연구는 ‘표적치료제 순차적 치료법’이란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도화선이 됐다. 연구 결과는 세계 최고 암 학술지인 임상종양학회지(Journal of Clinical Oncology, 인용지수=44.5)에 실렸다. 당시 세계폐암학회장이 직접 논문에 대한 편집자 주를 작성했을 정도로 학계엔 큰 영향을 미친 논문이다.
2008년부터 전임강사로 환자 진료에 나섰지만 당시 글로벌 제약사들의 임상 3상 시험에서 세브란스병원은 제외되기 일쑤였다. 그는 글로벌 제약사에 직접 연락해 한국 의료기관을 신약 임상 연구 대상에 포함해달라고 요청했다. 일부 의사들은 ‘제약사에 고개 숙이는 의사’라며 그를 손가락질했다. 하지만 환자를 위한 길이라는 생각에 묵묵히 견뎠다. 수많은 신약 임상 연구 등에 참여하면서 여러 학술상 수상자로 이름을 올린 것도 이런 노력 덕분이었다.
렉라자 임상을 이끌면서 세계적 학술지 ‘란셋 온콜로지’에 논문을 발표했다. 렉라자의 임상시험은 물론 기술수출, 허가 등 모든 신약 개발 과정에 참여해 렉라자 안전성과 효능을 입증했다.
그는 국산 신약 연구에 머무르지 않았다. 조 센터장팀은 미국 터닝포인트의 ‘레포트렉티닙’ 다국가 임상연구를 주도하는 등 한국의 임상 수준을 세계적 수준으로 높였다. 이 약물은 미 식품의약국(FDA) 허가를 앞두고 있다. 이후 미국 브리스톨마이어스스큅(BMS)이 터닝포인트를 41억달러에 인수하는 데 큰 역할을 한 후보물질이다.
조 센터장은 글로벌 제약사 얀센의 폐암 표적치료제 ‘아미반타맙’ 다국가 1상 임상연구 총괄 책임자로도 참여했다. 전체 임상 대상자 중 국내에서만 50%의 환자 등록을 이끌었다. 2021년에는 ‘클래리베이트’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연구자에 이름을 올렸다.
성과가 알려지면서 그가 이끄는 연세암병원 폐암센터와 연세·유일한 폐암연구소는 글로벌 제약사가 폐암 치료제 신약 임상을 앞다퉈 의뢰하는 곳으로 유명해졌다. 조 센터장팀이 진행하는 폐암 신약 임상시험만 132건에 달한다. 이 중 85%인 113건은 다국가 임상시험이다. 임상 연구에 참여하겠다고 등록한 환자는 1500명을 넘는다. 국내 대학병원 중 연간 진료하는 폐암 환자가 1000명을 넘는 곳이 손에 꼽을 정도인 것을 고려하면 상당히 많은 숫자다.
■ 조병철 센터장 약력
△1999년 연세대 생화학과 졸업
△2001년 연세대 의대 졸업
△2019년~ 연세의대 연세암병원 폐암센터장
△2021년~ 연세·유일한 폐암연구소장
△2022년~ 식품의약품안전처 중앙약사심의위원회 위원
이지현 기자 bluesk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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