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전세 사기 피해자가 거주하고 있는 주택이 경매로 넘어가는 것을 한동안 보류하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최근 두 달 새 세 명의 전세 사기 피해자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자 특단의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윤석열 대통령은 18일 “전세 사기는 전형적인 약자 상대 범죄”라며 “정부 대책이 현장에서 제대로 작동하는지 점검하고, 또 점검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윤 대통령은 이날 용산 대통령실에서 국무회의를 주재하며 “최근 전세 사기로 인한 비통한 소식이 잇따르고 있는데, 이번에도 비극적 사건의 희생자는 청년 미래 세대”라며 “정부는 피해 신고가 없더라도 지원의 사각지대가 없는지 선제적으로 조사하고 찾아가는 지원 서비스를 해달라”고 당부했다.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은 이 자리에서 피해 주택 채권의 경매를 보류하는 방안 등을 보고했다. 윤 대통령은 보고를 재가하면서 “피해자들은 대부분 사회적 약자인데, 이런 지원 정책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으니 찾아가는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국토부와 금융위원회는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가 보유하고 있는 피해 주택 채권에 대해선 즉각 경매 보류 조치를 하고, 은행이 보유 중인 채권은 경매 매각 기일을 연기하도록 협의할 계획이다. 다만 정부가 은행에 경매 처분을 보류해달라고 요구할 근거가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자칫 은행들이 전세대출 요건을 강화하는 부작용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전망도 있다.
인천 미추홀구 전세사기피해대책위원회(대책위)에 따르면 전셋집이 경매로 넘어가 5월 내로 3차 매각기일이 정해진 사례만 260가구에 달한다. 대책위는 전세사기 피해를 본 3107가구 중 65%에 해당하는 2020가구가 경매로 넘어갈 것으로 보고 있다. 피해자에게 경매 낙찰은 ‘사형선고’에 가깝다. 전셋집이 낙찰되더라도 1순위 채권자에 해당하는 시중은행과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 등의 채무를 변제하고 나면, 임차인이 손에 쥘 수 있는 돈은 얼마 안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정부가 향후 새로운 대책을 내놓더라도 경매를 통해 팔린 전셋집은 구제받기 어렵다. 정부가 캠코뿐 아니라 시중은행에도 근저당을 잡고 있는 주택 경매 절차를 보류하라고 권고한 배경이다.
정부는 이날 윤석열 대통령의 국무회의 지시에 따라 경매 보류와 함께 한층 강화된 전세사기 피해자 구제 대책을 마련하기로 했다. 피해자가 요구하는 전면적인 피해실태조사 실시와 함께 정부 대책의 사각지대를 보완하고, 경락대금대출 등 전세사기 피해자 맞춤형 금융지원 프로그램도 추진한다. 소위 ‘건축왕’이라 불리며 전세사기를 주도한 임대인이 사망한 후의 상속 등 법률적 문제와 피해 주택의 선순위 조세채권(세금 징수 권리) 문제 등에 대해서도 적극 대처하기로 했다. 국토교통부는 △경매로 넘어간 주택에 대한 임차인 최우선 변제액 및 변제기준 상향 △연 1~2%대 저리 대출(전세대출 대환대출 포함) △긴급 거처 지원 등을 시행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정부 대책이 도덕적 해이 등 또 다른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은행의 경매 처분을 막을 경우 은행 건전성 하락 문제가 발생하고, 전세대출 요건 강화라는 또 다른 풍선효과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전세사기 피해와 집값 하락에 따른 전세보증금 반환 피해를 구분하기가 어려워 자칫 투자 부실까지 구제할 우려도 있다.
비슷한 피해 사례가 더 늘어날 가능성이 큰 것도 부담이다. 대법원 등기정보광장에 따르면 전·월세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해 법원 문을 두드린 임차인이 역대 최다 수준으로 증가했다. 전날 기준 3월 전국 집합건물에 대한 임차권설정등기(임차권등기명령) 신청 건수는 3414건으로, 처음으로 월 3000건을 돌파했다. 이 건수는 지난해 8월 1043건으로 1000건을 돌파한 뒤 매달 증가세다. 서울에서만 1075건의 임차권등기명령 신청이 나왔다. 경기도(1004건), 인천(719건), 부산(196건) 등이 뒤를 이었다.
이유정/도병욱 기자 dod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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