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의왕시 백운호수 옆에 자리잡은 타임빌라스는 프리미엄 아울렛이다. 체험형 쇼핑의 신기원을 열겠다는 롯데쇼핑의 야심 가득 찬 공간. 첫 삽을 뜨기 전까지 설계가 몇 번이나 바뀌었는지 모른다. 수년간의 논의 끝에 결론이 나왔다. ‘연면적 17만여㎡짜리 아울렛의 상징을 스케이트장으로 만들자.’
정문 앞 야외광장에 260㎡짜리 초대형 스케이트 파크가 바로 그것이다. 6개의 서로 다른 크기와 깊이의 원들로 이뤄진 스케이트장이다. 디자인은 산뜻하지만 뭐랄까, 색깔이 난해하다. 형광빛 연두색 일색이다. 촌스럽다고 해야 할지. 게다가 연두색은 밤낮이 없다. 밝을 땐 빛을 빨아들이고, 어두울 때 내뱉는 ‘인광(燐光) 페인트’를 사용해서다. 밤에도 야광으로 연두색 빛이 난다.
날씨가 조금씩 따뜻해지면서 ‘보드의 성지’로 자리잡은 이곳엔 스케이트 보더들이 하나둘 모이고 있다. 멋들어진 차림으로 화려한 기술을 뽐내는 보더들은 알까. 이곳이 단순한 스케이트 파크가 아니라 세계적 예술가의 작품이라는 것을. 바로 구정아 작가(56)의 설치 작품 ‘내가모(NEGAMO)’다.
구정아는 해외 무대에서 작품성을 인정받는 작가다. 유럽 최대 현대미술관 프랑스 파리 퐁피두센터에서 개인전을 열 정도다. 퐁피두에서 전시회를 개최한 한국인은 구정아를 포함해 단 두 명이다. 다른 한 명은 ‘미디어아트 거장’ 백남준이었다. 구정아는 최근 ‘미술계 올림픽’으로 꼽히는 베네치아비엔날레에서 한국관 대표 작가로도 뽑혔다. 그런데도 궁금증은 여전하다. 형광 연두색 페인트로 칠한 스케이트 파크가 뭐 그리 특별하길래 예술이라는 건지.
답을 찾으려면 구정아의 이전 작품을 알아야 한다. 그의 작품엔 평범한 일상을 낯설게 보게 하는 힘이 있다. 그는 2009년 베네치아비엔날레에선 사람들이 누워있는 잔디밭에 지름 1㎝의 반짝거리는 큐빅을 흩뿌려놨다. 2010년 미국 뉴욕 댄 플라빈 아트 인스티튜트에선 전시장을 형광 분홍빛으로 꽉 채웠다. 그냥 지나치고 말 법한 공간을 그만의 방법으로 새롭게 덧칠하는 것이다.
스케이트장 ‘내가모’도 마찬가지다. 연두색은 온종일 같지만 날이 저물면 완전히 달라진다. 낮 동안 빨아들인 빛을 내뱉는 인광 페인트 덕분에 따로 전기를 연결하지 않아도 어둠 속에서 환한 연둣빛으로 변한다. 구정아의 스케이트 파크는 또 다른 의미도 있다. ‘스케이트 파크 프로젝트’가 시작된 건 2012년 프랑스 바시비에르 섬이었다. 당시 구정아는 프랑스 남부의 외딴섬인 바시비에르 섬을 예술로 되살려보자는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그가 고안해낸 건 스케이트장이었다. 젊은이들이 제 발로 이곳을 찾아오려면 ‘놀거리’가 필요하다는 생각에서였다.
5년에 걸쳐 조성된 첫 번째 스케이트 파크 ‘오트로(OTRO)’는 바시비에르 섬에 젊은 관광객들을 끌어오며 ‘대성공’을 거뒀다. 그러자 세계 곳곳에서 ‘스케이트 파크를 만들어달라’는 요청이 쇄도했다. 타임빌라스의 ‘내가모’는 영국, 브라질, 이탈리아 등에 이어 구정아가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만든 스케이트 파크다.
작품 속엔 자기 긍정의 메시지도 담겨 있다. ‘내가모’라는 작품 제목은 ‘내가 뭐?’의 발음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외부에서 따가운 시선을 받을 때마다 맞받아치는 말이다. 작가는 말한다.
“아웃사이더 문화였던 스케이트 보드가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데는 보더들의 ‘고집’이 있었다. 보드를 탈 만한 곳을 찾아 세계 각국으로 떠나고, 때로는 경찰과 실랑이를 벌이며 자신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된다. ‘내가 뭐?’에는 그런 정신이 담겨 있다.”
‘굳이 왜 계단이나 난간처럼 위험천만한 곳에서 이러느냐’고 손가락질받으면서도 꿋꿋이 보드를 타기 위해 세계 곳곳을 누비는 보더들처럼. 이 공간은 때론 명상과 위로의 공간이 된다. 고집스럽게 나를 더 긍정적으로 바라보라는 메시지와 함께.
이선아 기자 sun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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