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봉오리도 간지러울 만큼 햇살이 따뜻하니 옷차림은 가벼워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수십 개의 터널을 지나 바닷가에 이르자 그곳은 아직 겨울의 끝자락이었다. 김영건 동아서점 대표의 에세이 <우리는 책의 파도에 몸을 맡긴 채>가 떠올랐다. ‘속초에는 3월에 눈발 날리는 풍경이 흔하다’는 그 문장이.
이 책의 저자는 속초에서 평생 나무배를 제작해온 양태인, 전용원 목수의 이야기를 담은 책 <나는 속초의 배 목수입니다>의 기획을 담당했다. 그들이 배를 만들었던 칠성조선소에는 별도의 전시실이 마련돼 있어 그 이야기를 영상으로도 볼 수 있다. 전쟁 이전 속초는 38선 이북의 땅이었다. 고향에 닿을 수 있을 것이란 희망으로 속초에 이른 피란민들은 전쟁이 끝나자 졸지에 실향민이 됐다. 속초가 다른 지역과 사뭇 다르게 느껴졌다면 아마 역사에 운명을 맡긴 이들의 흔적 때문일 테다.
한편으론 어떤 역사니, 전통이니 해도 지금의 속초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쪽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가령 60여 년을 3대에 걸쳐 이어온 동아서점도 본래 있던 자리 인근에 새로이 문을 열었다.단골들은 장소가 바뀌었다고 해서 그곳이 원래의 동아서점과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마땅한 주제를 선정해 간단한 소개 글과 함께 매대에 진열해둔 책과, 문을 열자마자 자격증 서적을 추천해달라고 하는 손님의 말에 고민해 서적을 고르는 김 대표를 보며 이유 모를 안도감과 행복을 느끼기도 했다.
‘왜 속초인가’를 묻지 않아도 되는 여정은 시 중심에서 멀지 않은 주택가 1층에 있는 ‘라이픈’에서도 이어진다. 커피 생두를 옅은 황색의 색깔이 도드라질 만큼 약하게 볶는 ‘라이트 로스팅’은 상대적으로 산미가 살아나고 향미가 풍성해 생두 본연의 맛을 살리는 데 적합하다. 웅장함과 숭고함이 담긴 산과 바다가 멀지 않고, 때때로 그 모습에 위안을 얻을 수 있는 속초에 꽤 어울리는 커피이기도 하다.
여행으로 찾은 속초에서 괜한 감상에 빠져 서점과, 카페와, 어떤 장면들에 필요 이상으로 감정 이입을 한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소금기가 섞인 바다 내음이 맴도는 여행의 다음날, <우리는 책의 파도에 몸을 맡긴 채>를 다시 읽으며 여행 중 찾아간 그 공간에서의 감정이 왜곡된 것만은 아님을 깨달았다.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기쁨과 예상치 못한 위로는 도처에 있다는 것을, 터널을 지나 마주한 바닷가에도, 어쩌다 마주친 책 속의 한 구절에도 있음을 알게 됐다. 그리고 그 속에는 조건을 달지 않은 누군가의 환대도 있었음을 알았다.
조원진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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