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창살을 보고 만들었다는 말도 있었지만, 언어학과 음성학의 대가인 세종대왕이 혀뿌리 모양을 바탕으로 만든 과학적인 문자가 바로 한글이다. 예를 들어 어금니 소리글자 ㄱ은 혀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모습이며, 입술소리 글자 ㅁ은 입 모양을 본뜬 것이다.
한글 창제의 원리에 대해 많은 것이 확인됐음에도 한글 원리에 대한 해석에서 합의되지 않은 부분이 있다. 자음 글자는 혀나 입술 같은 발성 기관을 본떠서 만들었다는 건 이해하지만, 모음 글자는 성리학 이론과 관련된 천지인을 가져와서 만들고 조합했다는 것을 두고 학계 의견이 분분하다.
연세대 의대 명예교수와 제일이비인후과의원 대표원장으로 재직 중인 저자는 독립운동가이자 한글학자인 외솔 최현배 선생의 손자다. 그 인연으로 외솔회 이사장에 이어 세종대왕기념사업회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최현배 선생은 조선어학회 창립과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에 참여해 일제강점기 때 3년간 복역했다. 광복 후 교과서 행정의 기틀을 잡고 <우리말본> <한글갈> <글자의 혁명> <나라 사랑의 길> 등의 저서를 집필했다.
저자는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회장을 맡은 2015년 <훈민정음 해례본>을 접했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한글, 즉 훈민정음이라는 문자 체계의 사용 방법을 알리기 위해 만들어진 책이다. 국보 제70호이며 유네스코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돼 있다. 대규모 언중이 실제 사용 중인 문자 시스템에 대해, 이를 만들어낸 사람이 직접 해설을 달아놓은 자료는 세계에 오직 <훈민정음 해례본> 하나뿐이다. 당연히 보물 중의 보물이고 세계 언어학자들도 극히 소중한 자료로 인정하고 있다.
저자는 두 차례에 걸쳐 논문을 발표하고 그 논문을 바탕으로 올해 1월 <훈민정음 음성학>을 발간했다. 천(·)지(ㅡ)인(ㅣ)이 소리 조음 시 ‘공명강’의 특징적 모습을 본떠 만들었다는 것은 이비인후과 의사들과 목소리를 연구하는 공학자, 정보기술(IT) 전문가들은 다 이해하는 내용이다. 공명강이란 목과 입속 등 공명을 일으키는 몸 안의 빈 속을 뜻한다.
<훈민정음 음성학>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1부에는 후두의 구조와 기능을 자세히 기록했다. 2부엔 <훈민정음 해례본>을 접한 이후 몰두한 음성학적 연구를 담았다. 각종 사진과 그림, 상세한 설명을 곁들여 훈민정음에 대한 완전한 이해는 물론 후두에 관한 풍부한 지식까지 습득할 수 있도록 했다.
저자는 <훈민정음 해례본>에 나오는 ‘설축’은 ‘설근의 수축’이라고 설명하면서 천지인에 대해 상세하게 증명한다. ‘아래 아(·)는 설축을 뒤로 내리면서 앞 공간을 동그랗게 만들어서 내는 것으로 소리가 깊다. ㅡ는 설근이 약간만 수축되고 소리는 깊지도 얕지도 않다. ㅣ는 설근의 수축은 전혀 없으면서 소리가 얕다’로 요약한다.
수백 년 전 ‘음성학의 대가’ 세종대왕이 창제한 한글의 과학적 면모를 제대로 이해하고 싶다면 일독을 권한다. 덤으로 어떤 과정을 거쳐 소리를 내는지 신비한 지식까지 얻을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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