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를 위해 우방국인 미국과 ‘살벌한 투쟁’을 벌인 것은 역설적이다. 전사자가 늘어나자 미국 내에선 발을 빼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고, 1951년 7월 휴전 협상이 시작됐다. 이대로 전쟁이 끝나면 미군은 철수할 것이고, 적화통일은 시간문제라고 본 이 대통령으로선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 대통령의 ‘휴전 결사반대, 북진통일’ 결의를 받아 든 미국은 이 대통령 제거를 위한 ‘에버레디 작전(Operation Everready)’까지 세웠다. 이 대통령은 휴전을 설득하기 위해 경무대를 방문한 마크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과 면담하는 내내 권총을 붙잡고 있었다고 한다. 책상 위에는 ‘북진 통일’이라는 혈서들이 쌓여 있었다.
이 대통령이 ‘단독 북진’까지 흘리며 노린 것은 미국이 휴전 대가로 한국의 안보를 확고하게 보장해주는 것이었다.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미지근한 반응을 보이고 휴전 협상에 가속도를 내자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극약 처방을 내렸다. 백악관에 “미국이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해주지 않으면 싸우다 죽을 것”이라는 내용의 편지까지 보내자 미국은 한 발 물러섰다. 1953년 10월 1일 미군 주둔과 유사시 자동 개입을 명시한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로 한·미 동맹이 시작된 것은 순전히 이 대통령의 분투(奮鬪) 결과였다.
미국을 국빈 방문 중인 윤석열 대통령은 워싱턴포스트(WP) 인터뷰에서 한·미 동맹에 대해 “역사적으로 가장 성공한 동맹이고 무엇보다 가치 동맹”이라며 “이번 방미가 양국 국민이 동맹 70주년의 역사적 의미 등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했다. 이 대통령은 조약 체결 뒤 담화에서 “이제 우리는 여러 세대에 걸쳐 이 조약으로 갖가지 혜택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했는데, 그 혜안(慧眼)에 머리가 숙어진다.
홍영식 논설위원 ysho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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