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닭·오리 관련 업계에서는 ‘조류독감’이라는 용어에 거부감을 느낍니다. 사람에게 걸리는 ‘독감’을 연상케 함으로써 소비자 불안을 부채질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1998년께부터 민간협회 등과 함께 ‘조류독감’이란 말 대신 ‘조류인플루엔자(AI)’를 써줄 것을 언론에 요청했다. 해마다 반복되는 조류 전염병으로 가금(家禽: 닭, 오리, 거위 등 집에서 기르는 날짐승)산업 등에 끼치는 피해가 커지자 용어 바꾸기에 나선 것이다.
한국 정부 역시 국민에게 ‘코로나’라는 이름이 익숙하다는 점에서 우리말 이름으로 ‘코로나19’로 쓰고 부르도록 발표했다. 새로운 전염병의 이름을 지을 때 특정 지역이나 사람, 동물 이름을 병명에 사용하지 않는다는 원칙에 따른 결정이었다. 해당 지역이나 민족, 종교 등에 미칠 부정적 영향을 막기 위한 노력인 셈이다.
“원숭이두창 질병명을 변경한 이유가 있나요?” “세계적으로 엠폭스가 유행했던 지난 1년 동안, 변경 전 질병명인 ‘원숭이두창(Monkeypox)’은 차별과 낙인적 용어로 사용돼 여러 단체·국가 및 개인이 WHO에 질병명 변경을 건의했습니다.” 이에 따라 WHO는 2022년 11월 28일 ‘MPOX’를 새로운 영어 질병 동의어로 채택했다. 한국 질병관리청에서도 곧바로 그해 12월 14일 질병명을 ’원숭이두창‘에서 ‘엠폭스’로 변경해 사용한다고 발표했다.
조류인플루엔자(AI), 코로나19, 엠폭스…. 이들에겐 감염병이란 사실 외에도 언어적 공통점이 있다. 모두 완곡어법으로 만들어진 말이라는 점이다. 완곡어법은 듣는 사람의 감정이 상하지 않도록 모나지 않고 부드럽게 말을 쓰는 표현법이다. 고전적인 예를 들자면, ‘변소’를 ‘화장실’이라고 하거나 ‘죽다’를 ‘돌아가다’ 식으로 표현하는 것을 이른다. 북에선 ‘에두름법’이라고 부른다.
‘정치적 올바름’은 말의 사용에서 인종이나 민족, 언어, 종교, 성적 지향, 장애, 직업에 따른 편견이나 차별이 들어가지 않도록 하자는 사회적 운동이다. 이런 흐름은 우리말 쓰임새가 한 단계 진화하는 데 크게 기여해왔다. 가령 (다소 논란이 있지만) 전통적으로 써오던 장님, 벙어리, 귀머거리 같은 말을 각각 시각장애인, 언어장애인, 청각장애인 등으로 대체할 수 있었던 게 그런 흐름의 결과였다.
정치적 올바름은 참과 거짓을 따지지 않는다. 그보다 ‘누가 말하는가?’, 즉 발화의 정당성이 더욱 중요한 논점이 된다. 주요 기능은 규정하고 수행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정치적 올바름이 자칫 만연해지면 언제든 전체주의로 흐를 위험성을 안고 있기도 하다. 우리가 말을 엄중히 살피고 따지는 까닭도 그런 긍정·부정의 두 측면을 아울러 들여다보기 위한 것이다.
‘엠폭스, 코로나19(COVID-19), AI(조류인플루엔자)’는 조어법상 줄임말 수법을 이용해 탄생했다는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모두 우리말에 스며든 외래 약어다. 엠폭스(MPOX)는 ‘Monkeypox’에서, COVID-19는 ‘corona virus disease 2019’에서, AI는 ‘avian influenza’에서 머리글자 일부를 취해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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