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 지붕 아래 있지만 각 사업부는 독립 회사처럼 움직인다. 사업부들은 다양한 거래 관계로 엮여 있다. 예컨대 MX사업부는 스마트폰용 반도체를 개발·판매하는 시스템LSI사업부의 주요 고객이다. 갑(甲)·을(乙)의 관계도 명확하다. 시스템LSI사업부 임원들이 MX사업부 임원들과 만날 때, 일부러 MX사업부의 대표 스마트폰인 '갤럭시'와 같은 브랜드의 와인을 사간 적도 있다고 한다.
같은 삼성전자 명함을 갖고 다닌다고 해서 거래 때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좋은 게 좋은 것' 같은 말은 안 통한다고 한다. 사업부 대표 제품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자사 타 사업부의 부품 대신 외부 경쟁사 부품을 갖다 쓰는 사례도 적지 않다. MX사업부가 올해 출시한 프리미엄 스마트폰 갤럭시S23에 시스템LSI사업부의 모바일 AP '엑시노스'를 채택하지 않은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갤럭시S23에는 시스템LSI사업부의 경쟁사인 퀄컴 '스냅드래곤'이 전량 탑재됐다.
지난 27일 삼성전자가 개최한 1분기 실적 설명회(콘퍼런스콜)에서도 확인됐다. 시스템LSI사업부는 보도자료에 "차세대 플래그십 모바일 SoC(통합칩셋) 준비", "모바일 SoC는 제품 비즈니스 경쟁력 강화를 위해 플래그십 재진입을 추진한다"는 문구를 넣었다.
애널리스트들과의 질의응답에서도 시스템LSI사업부 임원은 "MX 사업부는 시스템LSI의 주요 거래처(고객)로, 당사는 갤럭시 시리즈의 모든 세그먼트에 적용할 수 있는 제품 라인업을 갖추고 사업 전개를 목표로 하고 있으며, 플래그십 재진입도 추진 중"이라고 강조했다. 차세대 플래그십 모바일은 '갤럭시 S24'를 뜻하고 모바일 SoC는 엑시노스 AP다. 갤럭시S24에 엑시노스를 다시 공급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란 얘기다.
'을'인 시스템LSI사업부가 '갑'인 MX사업부를 앞에 두고(이날 콘퍼런스콜엔 MX사업부 임원도 참석했다) '플래그십 재진입 추진' 같은 이야기를 꺼내는 건 이례적이다. 이 때문에 이날 보도자료 문구와 시스템LSI사업부 임원의 발언에 대해 'MX사업부와 시스템LSI사업부가 사전에 조율한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시스템LSI사업부는 갤럭시S23에 엑시노스 AP 탑재가 무산된 이후 '재진입'을 위해 칼을 갈았다고 한다. AP의 주요 기능인 그래픽처리프로세서(GPU)의 성능을 높이기 위해 미국 AMD와의 기술협력도 강화하고 있다. 최근엔 GPU 전문가들을 적극 채용 중이다. 해외의 반도체 성능 테스트 전문 사이트에선 '갤럭시 S24에 들어가게 될 '엑시노스 2400'(가칭)의 성능이 경쟁업체 칩보다 우수하다'는 내용이 올라오기도 한다. 엑시노스 2400의 성능이 많이 개선됐기 때문에 갤럭시S24에 탑재해도 문제가 될 것이 없다는 것이다.
삼성전자 사업보고서에 따르면 MX사업부는 2022년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AP를 사기 위해 9조3138억원을 썼다. 전체 원재료 구매의 12.8%에 달하는 적지 않은 금액이다. 삼성전자는 "모바일 AP 가격은 전년 대비 약 77% 상승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삼성 안팎에선 "퀄컴이 스냅드래곤 AP값을 세개 불렀다"는 얘기가 흘러나온다. 갤럭시S23에는 엑시노스를 안 쓰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사실상 퀄컴 이외의 대안이 없었다. 그래서 MX사업부는 눈물을 머금고 퀄컴이 원하는 값을 쳐줬다.
하지만 갤럭시S24용 AP 가격 협상과 관련해선 MX사업부가 '퀄컴에 끌려가지 않겠다'는 의지를 나타낸 것으로 분석된다. '엑시노스를 갤럭시 S24에 쓸 수 있다', '이번엔 대안이 있다'는 얘기를 흘리면서 협상을 유리한 국면으로 전환시키려는 전략으로 분석된다.
황정수 기자 hj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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