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남을 돕는 듯하지만 결과적으론 해를 끼치는 행위를 심리학 용어로 ‘인에이블링’(조장)이라고 한다. 이상행동을 조장한다는 뜻이다. 상대방을 의존적이고 무책임하며 동기를 부여받지 못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부모·자식 간 관계에서 주로 나타나는 사례다. 예컨대 아이 신발 끈을 매주고, 학교까지 차를 태워주고, 숙제를 대신 해주는 등의 행위다. 이 외에도 가족이나 친구, 연인, 직장 동료 등 모든 인간관계에서 인에이블링이 나타날 수 있다.
정부가 하는 인에이블링도 있다. 보조금 지급이 대표적인 사례다. 대통령실에 따르면 2016년부터 2022년까지 지난 7년간 각종 시민단체와 협회, 재단, 연맹, 복지시설 등 비영리 민간단체에 총 31조4000억원 규모의 정부 보조금이 지급됐다. 박근혜 정부 때인 2016년 3조5600억원이던 지급액은 문재인 정부 들어 2018년 4조원, 2021년 5조원을 넘어섰다. 정부뿐만이 아니다. 박원순 시장 재임 시절 서울시는 민간단체에 지원한 예산이 1조원에 육박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시민단체 등의 자율성과 독립성은 퇴색했다. 서울시 지원금을 받은 여성단체 중 박 시장 성추문 사건이 불거졌을 당시 이와 관련해 입장을 밝힌 곳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문재인 정부 들어 보조금 지급이 급증하다 보니 시민단체들의 좌파 편향적 정치색이 짙어졌다는 지적도 나온다. 여성가족부와 서울시를 통해 총 9000여만원의 보조금을 받은 촛불중고생시민연대는 지난해 11월 윤석열 정권 퇴진을 주장하는 중고생 집회를 열었다. 행정안전부와 경기도, 안산시로부터 2017년부터 지난해까지 110억원을 지원받은 세월호 피해지원사업은 북한 김정은 신년사 학습, 김일성 항일 투쟁 세미나 등에 돈을 사용하기도 했다.
‘MZ세대 노조’로 불리는 새로고침노동자협의회가 올해 정부 보조금을 받지 않기로 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새로고침협의회는 지난 3월 입장문을 통해 “자주성을 키우는 게 선결이라고 판단해 지원금을 신청하지 않았다”며 “올해 정부 지원금은 노동 사각지대에 있는 노동 약자들에게 지원됐으면 한다”고 밝혔다. 최근 5년간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로부터 총 1500억원의 지원금을 받은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한국노동조합총연맹 등 양대 노총과 대비된다.
국제 환경단체인 그린피스는 정부나 기업 후원을 받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지원금을 내는 정부나 기업의 실태를 폭로하거나 변화를 요구하는 캠페인을 펼치기가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국경없는의사회는 각국 정부의 지원을 전체 재원의 20% 미만으로 제한한다.
엄밀하게 말해 노조나 시민단체는 정부 지원을 받아서는 안 된다. 과거 단결권 등 노동권이 취약할 때 정부가 사용자 측과의 균형을 맞춰주기 위해 보조금을 지급한 것이 관행으로 굳어져 왔지만 현재 양대 노총은 공권력조차 쉽게 건들지 못하는 거대 단체다. 이익단체의 일종인 노조에 국민 세금을 지원해야 할 명분도 없다. 시민단체 역시 정부나 특정 정파와의 거리를 유지해야 순수성을 유지해나갈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윤석열 정부 들어 보조금 지급의 문턱을 높이기로 한 것은 평가받을 만하다. 외부 검증을 받아야 하는 국고보조금 감사 대상을 사업 규모 3억원 이상에서 1억원 이상으로 넓힌 것이다. 지난달 회계자료 제출을 거부한 한국노총은 보조금 지원 대상에서 제외했다.
노조와 시민단체 스스로도 보다 건강한 조직으로 발전하고 자율성을 키워나가려면 정부 지원을 과감하게 뿌리칠 필요가 있다. 돈이 아쉬워 계속 정부에 손을 벌린다면 잠깐 먹고 살자고 ‘공짜 1달러’에 아이들의 미래를 희생하는 어른들과 하등 다를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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