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준 전 외교부 북핵대사
20세기 냉전시대 이래로 핵보유국들에게 있어 전략핵잠수함(SSBN)은 핵억지력의 최후 보루였다. 적국의 선제 핵공격으로 자국 핵무기가 모두 파괴되더라도 심해 깊은 곳에 숨어 생존한 단 한 척의 잠수함만으로 적국을 초토화하려 만든 무기가 전략핵잠수함이다. 위치를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 무선교신조차 끊은 채 태평양 심해저나 북극 빙하 밑을 몇 달씩 항행하다 유사시 본국 지시에 따라 적국에 핵미사일을 날리는 것이 전략핵잠수함의 유일한 임무다. 그래서 전략핵잠수함은 잠수함이라기보다는 거대한 이동식 해저 핵무기 저장소와 같은 존재다.
핵잠수함의 우수한 생존력을 감안, 대다수 핵보유국은 적국의 선제 핵공격에 대응하기 위한 최종병기로 전략핵잠수함을 보유 중인데, 미국 14척, 러시아 12척, 중국 6척, 영국 4척, 프랑스 4척, 인도 1척 등이다. 미국 오하이오급 전략핵잠수함 1척에 적재된 트라이던트2 다탄두 핵미사일 24기에는 폭발력이 히로시마 원폭의 32배인 W88 수소탄두 192개가 적재된다. 핵무기 총량이 히로시마 원폭의 무려 6000배이니, 몇 개 나라를 초토화하고도 남을 위력이다.
이처럼 무시무시한 최종병기인 전략핵잠수함이 북핵에 대응하는 미국의 강력한 핵억지력 제공 의지의 상징으로 앞으로 한국 항구를 자주 찾게 될 전망이다. 북한이 2017년 제6차 핵실험을 실시한 이래 지난 5년간 국내적으로 독자핵무장, 미국 전술핵 재반입, 핵공유 등 여러 구상이 난무한 바 있으나, 지난주 4.26 한미 정상회담에서 채택된 ‘워싱턴 선언’을 통해 핵우산 강화를 위한 핵협의그룹(NCG) 창설과 미국 전략핵잠수함의 한국 수시 기항을 통한 핵억지력 강화로 최종 가닥을 잡았다. 그 대신 한국 정부는 핵무장을 금지한 NPT 협정과 우라늄 농축 및 플루토늄 재처리를 금지한 한미 원자력협정의 준수를 재확인 함으로써, 독자핵무장 논의에 종지부를 찍었다.
연쇄적 국제핵확산을 초래할 수 있는 한국의 독자핵무장을 미국이 용인할 가능성도 없고, 한국의 경제적 몰락을 초래할 제재조치를 감수하고 독자핵무장을 강행할 수도 없고, 미국 전술핵무기 재반입과 나토식 핵공유도 미국 핵전략상 불가능한 상황에서, 미국 전략핵잠수함의 빈번한 정례적 한국 기항은 그나마 가능성 있는 가시적 핵억지 방안으로 거론돼 왔다. 전략핵잠수함은 어디서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를 때 적국에 대한 억지력과 공포감을 극대화할 수 있기에, 미국이 전략적 손실을 감수하고 공개적 한국 기항 방침을 결정한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한 전략핵잠수함의 한국 기항은 뜻밖의 강력한 핵억지력을 발휘할 가능성이 있다. 북한 전체 핵무기의 수십 배에 달하는 핵무력을 탑재한 전략핵잠수함의 한국 기항이 연쇄적으로 이루어질 경우, 간헐적이나마 핵무기 국내배치 효과를 기할 수 있고, 신냉전체제의 대립상황에서 중국 핵전력에 대한 억지력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 핵잠수함의 트라이던트2 핵미사일은 최대사거리 12,000km, 초속 8km, 탄착오차 90-120m로서, 부산항에서 평양까지 2-3분, 평택항에서 북경까지 3-4분 밖에 소요되지 않는다. 훗날 미국 전략폭격기의 한국 착륙까지 이루어지면 핵억지력의 상시성은 더욱 강화될 것이다.
한편, 금번 워싱턴 선언에 한미 원자력협정 준수 약속이 새삼 명기된 점을 비판하면서 한국도 일본처럼 원전 핵연료 제조를 위한 우라늄농축과 플루토늄 재처리 권한을 미국에 요구해야 한다는 견해가 제기되고 있는데, 정부도 거시적 시각에서 이를 진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일본은 1988년 미일 원자력협정에 이를 반영하기 위해 10년 이상 미국의 신뢰를 얻기 위한 집요한 노력을 기울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이 이를 위한 대미 교섭에서 성공하려면 이를 이용해 핵무장을 추구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미국에 심어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윤석열 정부가 금번 워싱턴 선언에서 독자핵무장 불추진을 명확히 하고 NPT 협정과 한미 원자력협정 준수를 재확인한 것은 그러한 대미 협상을 위한 좋은 시작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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