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입에게 20살 연상 직원과 "사귀라" 강요…法 '성희롱' 판결

입력 2023-05-08 08:00   수정 2023-05-08 08:16



직장 상사가 신입사원에게 나이 많은 직원과 사귀어보라는 식으로 몰고 가는 행위가 직장 내 성희롱에 해당한다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

8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민사항소8-2부(이원중 김양훈 윤웅기 부장판사)는 최근 국내 한 대기업 신입 직원 A 씨가 상사 B 씨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로 판단한 1심을 유지했다. 이와 함께 B 씨가 A 씨에게 진지하고 충분한 사과를 했는지 의문이라면서 징계가 이뤄진 점 등을 고려해 위자료를 300만원으로 정했다.

재판부는 단순 농담이라도 상하 관계 속에서 사회 통념상 '성적 굴욕감'을 줬다면 위자료를 줘야 한다고 판단했다. 상사가 직장 내 지위를 이용한 성적 언동으로 성적 굴욕감 또는 혐오감을 느끼게 하는 것은 남녀고용평등법이 금지하는 '직장 내 성희롱'에 해당한다.

A 씨는 부서장인 B 씨 등 다른 상사 3명과 점심을 먹었다. A 씨는 당시 입사 4개월 차 신입사원이었고, B 씨는 근속연수 25년인 간부로 두 사람은 이날 처음 만났다.

식사 중 B 씨는 A 씨가 거주하는 지역을 듣자, 당시에 자리에 없었던 20세 연상 C 씨를 언급하며 "C 씨도 거기에 사는데, 둘이 잘 맞겠네"라는 말을 했다. 이어 "치킨을 좋아하느냐"는 B 씨의 질문에 A 씨가 "그렇다"고 답하자, "C 씨도 치킨 좋아하는데, 둘이 잘 맞겠네"라고 거듭 말했다.

A 씨는 "저 이제 치킨 안 좋아하는 거 같다"고 완곡하게 거부 의사를 밝혔지만, B 씨는 "그 친구 돈 많아. 그래도 안 돼?"라며 다시 사귀라는 취지의 말과 분위기를 조성했다.

결국 이 사건은 해당 기업에서 공론화됐고, 회사 측은 인사 조처를 통해 A 씨와 B 씨를 분리했다. 그뿐만 아니라 B 씨에게 견책 3일 징계 처분했다.

A 씨는 이후 B 씨로 인해 정신과 치료를 받고 휴직까지 하게 됐다며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고, 1심에 이어 항소심에서도 B 씨의 발언은 '성희롱'이라 판단했다. 재판부는 A 씨의 완곡한 거부 의사에도 돈이 많은 남성은 나이·성격·환경·외모 등에 관계없이 훨씬 젊은 여성과 이성 교제를 할 수 있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는 점에서 성희롱에 해당한다고 봤다.

재판부는 "대화가 완전히 대등한 관계에서 이뤄졌으리라 보기 어렵고 다른 사원들도 같이 있었던 자리라는 상황을 종합하면 남성인 피고의 발언은 성적인 언동"이라며 "여성인 원고가 성적 굴욕감을 느꼈겠다고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고 판결 이유를 밝혔다.

B 씨는 "노총각인 남성 동료에 관한 농담일 뿐 음란한 농담과 같은 성적인 언동을 한 것이 아니다"고 항변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019년 7월 16일부터 개정된 근로기준법에 따라 시행된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에 따르면 직장 내에서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업무상 적정 범위를 넘어서서 다른 근로자에게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를 할 경우 징계 대상이 된다. 직장 상사가 나이 어린 직원에게 일방적으로 감정을 강요하는 것 역시 직장 내 괴롭힘이자 성희롱으로 판단된다. 이를 거절했다는 이유로 업무로 불이익을 준다면 직장내 괴롭힘으로도 신고가 가능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지난해 공군 제15특수임무비행단(15비)에서 발생한 여군 하사 성추행 사건에서도 피해 하사 D 씨에게 농담을 빙자하여 10살 넘게 차이 나는 자기 동기를 언급하며 "사귀라"고 강요하고, "너는 영계라서 괜찮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하사 E 씨가 2차 가해를 한 혐의로 군인권센터의 지적을 받은 바 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2021년 국민 1만여명을 대상으로 성희롱에 대한 의식 수준을 조사했는데, 성별과 연령에 따라 편차가 큰 것으로 나타났다. 당시 연구진은 "나이 많은 남성 상급자와 2,30대 여성 하급자가 성희롱에 대한 인식차로 갈등을 겪기 쉬운 상황"이라며 "갈등과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교육 등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소연 한경닷컴 기자 sue123@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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