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함'에 반기든 '양파'…튀르키예 에르도안 최대 '실각 위기'

입력 2023-05-10 11:30   수정 2023-06-09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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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이 공공 부문 근로자들의 임금을 45% 대폭 인상하겠다고 밝혔다. 대선을 불과 5일 앞두고 나온 발언으로, 유권자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고육지책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집권 내내 ‘사보타주(고의적 방해 행위)’에 가까운 경제 정책을 펼쳐왔다는 평가를 받는다. 수년째 계속돼 온 경제난으로 추락한 민심은 지난 2월 발생한 대지진 이후 최악으로 치달았다. 이번 대선에서 에르도안 대통령의 20년 장기 집권 체제가 종식될 수 있을지에 전 세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올들어 2번째 임금 인상
튀르키예 현지 매체 데일리사바에 따르면 에르도안 대통령은 9일(현지시간) TV로 생중계된 연설에서 “공공 근로자들의 최저임금을 복지분담금 포함 월 1만5000리라(약 102만원)로 45% 상향하겠다”며 ”약 70만명의 근로자들이 올해와 내년 받게 될 급여에 적용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는 “지난 6개월간 인플레이션 상황은 꾸준히 개선돼 왔다”며 “이는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며, 튀르키예 국민 그 누구도 이로 인해 무너지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부 발표에 따르면 튀르키예의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은 지난 4월 43.68%였다. 24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던 지난해 10월(85.51%) 대비 절반가량 하락한 수준이다.



임금 인상은 에르도안 대통령의 대표적인 포퓰리즘(인기영합주의) 정책 중 하나다. 튀르키예 정부는 지난 1월 전체 노동자의 최저임금을 8500리라(약 58만원)로 인상했다. 증가율은 55%(2022년 7월 대비)에 달한다. 정부는 오는 7월 최저임금을 최소 500달러(약 66만원)로 한 차례 더 인상할 방침이다. 베다트 빌긴 튀르키예 노동사회보장부 장관은 “실질 구매력을 보장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했다.

에르도안 정권은 임금 인상 외에도 가정용 천연가스 무상 공급, 전기세 인하, 조기 연금 수령 허용, 학생 대상 무료 인터넷 데이터 10GB 제공 등 포퓰리즘(인기영합주의) 정책을 줄줄이 쏟아냈다. 폴리티코유럽은 “임금 인상안은 트위터 등 소셜미디어(SNS) 상에서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며 “공공 근로자들이 전문 기술자들보다도 더 많은 돈을 벌게 될 것이란 비판이 거셌다”고 전했다.
‘역주행’ 통화정책에 경제 추락
이는 수년간 고집해 온 저금리 정책 탓에 물가가 치솟으면서 악화한 민심을 달래기 위한 행보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경제학 통념과는 달리 “고금리가 물가 상승을 부추긴다”는 신념하에 이른바 ‘역주행’ 통화 정책을 고수해왔다. 튀르키예 금리는 지난해 11월까지 4회 연속 내렸고, 올해 2월에도 한 차례 내려 근 3년 만에 최저 수준인 8.5%까지 낮아졌다.

그 결과 튀르키예 물가는 급등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최고 수준에 도달했다. 리라화 가치는 5년여간 76% 떨어졌다. 2021년 11.4%에 달했던 경제 성장률은 지난해 5.6%에 이어 올해 2.8%까지 급속도로 둔화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이런 가운데 5만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대지진으로 성장 전망이 한층 악화하면서 금리 정책이 이번 대선의 최대 화두로 떠올랐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재집권 이후에도 정책 전환은 없을 것이란 입장을 수 차례 밝혔다. 자신이 2021년부터 시행해 온 ‘튀르키예 경제 모델’이 올해부터 효과를 낼 것이라는 게 근거다. 이 모델은 낮은 금리로 수출과 생산, 투자를 일으켜 일자리를 창출하고, 경상수지를 흑자로 전환해 궁극적으로 물가를 낮추겠다는 것이 골자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지진으로 1000억달러(약 132조원)어치의 재건 비용이 발생했지만, 저금리 정책은 유지될 것”이라며 “튀르키예 경제에는 이 모든 부담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말했다.
20년 집권 이래 최대 위기
그러나 수 년간 생활고에 시달려 온 튀르키예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얻기엔 역부족이라는 평가다. 폴리티코의 최근 여론조사에서 에르도안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은 45%로, 6개 야당 연합의 단일 후보인 케말 클르츠다로울루 공화인민당(CHP) 대표(50%)에 뒤지고 있다.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대지진 진앙지인 카흐라만마라슈를 중심으로 집권당인 정의개발당(AKP)에 대한 지지율이 급락하는 추세다. 이 지역은 과거부터 AKP에 대한 지지율이 70%를 넘는 곳이었다.

클르츠다로울루 대표는 에르도안 대통령의 ‘경제 실정’을 비판하는 데 선거전의 초점을 맞췄다. 그가 소박한 주방 테이블을 배경으로 양파 한 알을 들고 물가 안정화 방안을 설명하는 짧은 동영상은 SNS상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그는 영상에서 “현 정권이 재창출되면 현재 30리라인 이 양파의 가격은 100리라까지 오를 것”이라며 “정권 교체에 성공한다면 이 나라엔 돈이 흐르고, 투자가 촉진되며, 통화가치가 절상되면서 번영이 올 것”이라고 말했다. 양파는 대부분의 튀르키예 요리에 들어가는 필수 식재료다. 지난 18개월간 가격은 5배가량(수도 앙카라 기준) 뛰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양강 구도를 형성하고 있는 클르츠다로울루와 에르도안 간 경쟁을 “양파와 군함의 대결”에 비유했다. 클르츠다로울루 대표의 영상이 온라인상에 게시된 바로 다음 날 에르도안 대통령이 새 군함 진수식에 참석한 모습이 공개됐기 때문이다. 대선(2회), 총선(5회), 국민투표(3회) 등 각종 선거에서 무수한 승리를 거둬 온 에르도안 대통령은 튀르키예 정치 역사에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2003~2014년 총리, 2014~2023년 대통령으로 20년째 권위주의적 면모로 장기 집권하며 ‘스트롱맨’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튀르키예 건국 100주년인 올해 치러지는 대선에서 에르도안 대통령의 실각 가능성은 그 어느 때보다 높은 것으로 점쳐진다. 이스탄불 사반치대학의 정치학 조교수이자 CHP 당원인 베르크 에센은 “에르도안 정권은 튀르키예 다당제 역사상 전례없이 오랜 기간 집권해 왔다”며 “고령의 독재자는 패배해야 마땅하다”고 말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면 튀르키예 헌법에 의거해 2033년까지 최장 30년간 집권할 수 있다. 튀르키예에선 중임 대통령이 조기 선거에서 승리하면 추가 5년 임기를 보장하고 있다. 14일 투표에서 과반 득표자가 나오지 않으면 28일 결선 투표에서 최종 당선자가 가려진다.

장서우 기자 suwu@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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