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한진해운 사태는 이미 2008년부터 잉태되고 있었고 2015년 말에 가속화됐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영향으로 2009년 큰 손실을 경험했던 글로벌 해운 산업은 ‘2010년 반짝 반등’으로 안도했는데, 이때가 선대 경쟁력이 성패를 좌우하는 분기점이 됐다.
머스크, MSC 등 초대형 경제선 건조의 선두주자들은 원가 경쟁력을 앞세워 2011년부터 시작된 치킨 게임에서 여유가 있었다. 반면 한진해운과 현대상선은 국내 부채비율 상한선에 막혀 초대형선 건조는 엄두도 못 낼 상황이었다. 설사 건조할 수 있는 여건이 됐다 해도 각각 속해 있던 얼라이언스 내부의 복잡한 사정으로 건조가 용이하지 않았다.
현대상선이 속해 있던 ‘G6 얼라이언스’의 경우 2012~2014년 얼라이언스 대표 회의에 직접 참석해 분위기를 기억하고 있는데, 초대형선을 건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G6 얼라이언스의 리더 격인 APL은 원래부터 사선 신조에 인색했다. 게다가 2018년 하팍로이드를 인수·합병(M&A)하려던 시도가 수포로 돌아가자 자신들의 운영 효율성으로 승부하려 했다. 일본계 선사나 현대상선도 같은 처지였다.
다만 OOCL과 하팍로이드는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2000년대 중반 선가가 낮은 시기 선복(船腹·적화공간)을 확보한 OOCL, 함부르크주 정부와 독일계 포워더(물류 주선) K&N(Kunne & Nagel)의 신규 투자를 바탕으로 M&A를 통해 중동계 선사 UASC 및 칠레 선사 CSAV를 인수한 덕이다. 이들이 발주해놓은 대형선의 혜택을 톡톡히 보게 된 것이다.
한진해운이 속해 있던 CKYH의 사정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한진해운 사태 이후 CKYH 멤버(회원사)였던 에버그린(Evergreen) 대표에게 듣기로는 한진해운이 CKYH를 떠나 G6로 간 원인 중 하나가 한진해운이 초대형선 건조에 대해 다른 회원사와 의견을 달리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한진해운은 초대형선의 수익성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보였다고 한다. 이러한 의견이 본의였는지 아니면 일종의 핑계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한진해운이 G6로의 이전을 2015년 이전부터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2015년 하반기 당시 인천항만공사 사장이었던 나는 포트세일즈(Port Sales)차 싱가포르를 방문해 친분이 있던 APL과 NYK 사장을 만났다. 당시 응 얏 청(Ng Yat Chung) APL 사장과 제레미 닉슨(Jeremy Nixon) NYK 사장은 과거 G6 얼라이언스의 최고경영자(CEO) 회의체의 중심 멤버였다. 이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는 다소 충격적이었다.
당시 APL은 CMA-CGM에 매각 결정이 난 직후로, 곧 APL을 떠나는 응 얏 청 사장은 한진해운이 현대상선 대신 G6에 가입하기 위해 로비 중이라고 했다. 닉슨 사장도 현대상선에 대한 G6 멤버사들의 불만이 위험 수위라고 귀띔했다. 이에 귀국 즉시 현대상선 담당 중역에게 이 같은 소식을 전했으나 현대상선의 얼라이언스 퇴출과 한진해운의 G6 가입을 막지는 못했다.
얼마 후 결국 현대상선이 G6 얼라이언스에서 퇴출되고 한진해운이 G6에 가입했다. 현대상선은 잘못된 운임정책과 얼라이언스 멤버사 간 정산금 지연으로 사상 사상 초유로 G6 멤버사에 의해 퇴출되는 굴욕을 겪었다.
이처럼 G6에서 퇴출당한 현대상선은 2016년 초 최악의 상황을 맞고 있었다. 얼라이언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M에게 손을 내민 셈인데, 2M도 막다른 골목에 몰린 현대상선을 한국 시장 여론을 의식해 단기적으로 품는 게 나쁠 것 없다고 판단한 듯하다. 이때만 하더라도 현대상선은 위태롭고 한진해운이 유리한 위치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현대상선의 G6 퇴출로 한진해운은 자신들에게 상황이 유리하게 전개된 나머지 너무 낙관한 것 아닌가 생각한다.
이후 예상 밖의 일이 벌어졌다. 당시 나는 인천항만공사에서 일하고 있어서 한진해운과 현대상선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언론 보도 이상으로 구체적으로 알진 못한다. 그러나 언론에 나타난 상황을 보면 현대상선에서는 직원들과 그룹사가 합심해 현대증권 매각 등 구조조정 요구에 적극 대응한 반면, 한진해운은 대응이 매끄럽지 못한 상태에서 정부와의 협상도 결렬을 거듭하며 결국 2016년 8월31일 아무도 예상 못한 법정관리 신청에 이르게 됐던 것 같다.
2016년 10월1일, 현대상선 재건이라는 미완의 과제를 안고 회사에 들어섰을 때 피해갈 수 없는 한진해운 사태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 사태의 파괴력은 엄청난 것이어서 현대상선을 넘어 한국해운 전체의 위기였다. 취임 초기부터 이미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의 현대상선 정상화는 뒷전으로 미뤄둔 채 한진 사태 수습에 올인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한진 사태는 전 세계 물류를 흔들었다. 8월31일 한진해운이 법정관리 신청을 했을 때 조양호 당시 한진그룹 회장의 측근들도 이 같은 위험성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해운 관련 경영진이 이 사실을 알았다면 법정관리 신청으로 인해 각종 물류 대란으로 야기되는 사태에 대비했을 텐데, 그렇지 못했던 것이 사태 수습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사전에 준비 안 된 한진해운 법정관리는 심각한 부작용을 낳았다. 우선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한진해운 소유 혹은 임대 컨테이너박스의 움직임이 동결됐다. 입항 거부된 한진해운 소속 선박에 선적된 G6 멤버사의 컨테이너도 같은 운명이 됐다.
당시 미국 유럽 수에즈 중국 일본 싱가포르 인도 등의 입항 거부로 해상에서 대기 중인 선박은 40여척에 달했다.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금전적 준비가 안 된 한진해운은 압류로 인한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 해당 각국 법원에 압류금지 명령(Stay Order)을 신청하는 정도가 최선이었다. 뒤늦게 긴급자금을 투입하긴 했지만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 격이 되고 말았다.
이렇듯 취임 초기는 매일 한진 사태 수습 방안을 놓고 열리는 정부 및 산업은행과의 연석회의, 화물이 묶인 화주의 도움 요청에 대한 응대, 한국으로부터 나가는 수출 물량을 소화하기 위한 추가 선박(Extra Loader) 투입 등으로 눈코 뜰 새 없이 지나갔다.
※ [대한민국 해운강국의 길 - 유창근 전 HMM 대표 육필 회고] 4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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